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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삼 가족의 소중함”…메르스 공포의 역설
[헤럴드경제=이지웅 기자]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파동이 연방 이어지자 “이렇게 불안한 사회에서 단 하나 건진 것은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반면 당장 생존이 벅차고 평소 갈등이 깊었던 이들은 가족 간 결속 강화라는 ‘불안의 역설’마저 누리지 못한 채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출산을 두 달여 앞둔 아내와 단 둘이 사는 김모(36ㆍ서울 동대문구ㆍ금융업)씨는 이달 초 메르스 사태가 확산되자 업무 약속을 제외한 회식 등 일정은 일체 참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씨는 “만삭의 아내가 너무 걱정되기도 하고, 정부의 헛발질을 계속 보다 보니 위험이 발생하면 누구를 믿기보다 아내를 포함한 양가 부모님까지 내가 살펴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9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인근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거리를 걷고 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작은 건설회사 간부인 정모(42ㆍ경기 성남)씨는 지닌달 말부터 회사 회식을 줄이고 이달 워크숍 일정도 취소했다.

정씨는 “최근 3주간 주말 내내 아이들과 함께 하니 아이들만 요즘 신난 상황”이라며 “불안한 것만 빼면 역설적으로 메르스 때문에 가족이 더 화목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는 세월호, 올해는 메르스를 연달아 겪고 나니 회사 동료들도 가족에 대한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서울 남영역 인근에서 또래 2명과 자취하는 취업준비생 이모(28)씨는 이달부터 하루에 한 번 꼴로 부산 사는 부모님과 안부전화를 한다.

통화는 1분도 채 안 걸리고 ‘마스크 썼냐’, ‘반찬 안 모자르냐’ 등 통화내용도 건조하지만, 예전에는 일주일에 단 한 통 전화도 안 했었다.

이씨는 “어머니가 만성 신부전으로 고생 중인데, 지병 있는 고령자에 메르스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 걱정부터 됐다”며 “취업 탓에 싸운 적도 많은데, 힘들수록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고 했다.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안이 제공하는 이러한 역설과 동떨어진 가족들은 여전히 많다.

어머니는 한 아파트 단지의 청소일을, 본인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병행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A(29)씨는 “살기에 바쁜 동료들을 보면 메르스에 신경쓰는 것도 다소나마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 같다”고 말했다.

그는 “메르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가족과 함께 메르스를 대화 주제로 삼는 것은 하루를 빽빽하게 채워야 막고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다”고 말했다.

몇 해 전 결혼 문제와 직장 퇴직 문제로 가족과 갈등을 빚다 서울 대문구 원룸에 나와 산다는 B(여)씨는 “세월호나 메르스나, 그런 사건 이후 우리 가족에 변한 건 거의 없다”며 “외려 가족에 대한 섭섭함이 더 커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단위가 가족 중심으로 짜여 있는 탓에 어떤 사태를 대비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가족의 결속력은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설 교수는 “하지만 그것도 가족들이 처한 상황 나름이다. 평소 유대가 좋은 가족은 불안을 계기로 더욱 똘똘 뭉치고 정서적 커뮤니케이션을 활발히 하지만, 해체된 가족 등 결집할 하등의 이유와 여유가 없는 가족은 사회적 불안이 어떤 긍정적 효과를 주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plat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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