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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X파일]‘未生’ 품어준 서울역고가, ‘이젠 편히 쉬고 싶어요’
[헤럴드경제 = 김상수 기자]만리동 고개 달동네에 살던 어린 시절입니다. 남대문 시장과 가까운 탓에 동네 곳곳 건물마다 ‘제품집(봉제업)’이 가득했습니다. 옆집 아저씨도, 그 옆집 아주머니도 태권도라, 학원이라 간판만 남은 반지하 방에 모여 밤새 봉제일을 했습니다.

오토바이로,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땐 자전거로 큰 봉지마다 옷을 가득 싣고 하루에도 몇번씩 고가를 오갑니다. 남대문시장과 만리동 사이, 서울역 고가는 그 아저씨의 아주머니의 일터였고, 삶이었습니다. 한여름이면 오토바이, 자전거에서 흘린 아저씨의 땀이 고가 곳곳에 수십년동안 쌓이고 쌓여, 이젠 얼룩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남산도, 63빌딩도 사치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서울역 고가는 고단한 삶 속 잠깐이라마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늦은 밤 버스에 지친 몸을 눕고, 고가 위에서 창밖으로 바라본 서울역 역사와 야경. 그래도 서울은 아름답구나. 그 버스는 고가를 지날 때마다 모두 말 없이 창밖을 봅니다.

이젠 사라진 아현 고가도로가 국내 최고(最古)의 고가도로이지만, 그보다 역사가 짧을 서울역 고가는 ‘미생’의 땀과 눈물이 가장많이 담긴 고가일 것입니다. 뜨거웠던 80년대, 이제 막 상경한 이들에게 서울역 고가는 막막한 타향살이의 첫 모습이었고, 남대문시장을 오가는 상인들에겐 한여름에도 수없이 오가야 할 땀의 통로였습니다. 달동네인 만리동 고개 주민에겐 도심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죠. 가깝게는, 드라마 미생에서도 서울역 고가가 등장합니다. 장그래가 답답한 미생의 현실로 한숨 쉴 때마다 그 뒷배경엔 어김없이 서울역 고가가 보입니다.

수많은 미생의 발이 돼 주었던 탓일까요. 아님, 빨리빨리 시대 속에 부실하게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숙명 탓일까요. 서울역 고가는 최악의 안전등급을 받았습니다. 더는 옛구실을 할 수 없는 셈입니다.

서울역 고가는 이제 쉬고 싶은 모양입니다. 혹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가 봅니다. 그런데 어쩐지 서울역 고가는 보수공사를 받지도, 혹은 공원으로 다시 태어나지도 못한 채 원성만 듣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뉴욕 하이라인파크를 본떠 공원을 만들겠다는 입장이고, 남대문상인들은 고가가 사라지면 교통 접근성이 떨어진다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서울역 고가가 공원으로 변모해 관광명소가 되면 남대문 시장에도 활력소가 될 것이란 입장입니다. 상인들은 교통접근성이 떨어지고, 공원이 되면 치안 문제도 심각해질 것이라며 반대하죠. 이미 한차례 버스 노선이 줄어들면서 상권이 크게 죽었는데, 아예 고가가 공원으로 바뀌면 상권이 바닥을 치리란 우려입니다. 또 공원화되면 노숙자 등이 늘어날 것이란 주장도 합니다.

서울시는 접점을 찾고자 순환버스 노선 신설을 검토했지만, 담당부서인 버스정책과에서 차고지가 없어 배차 관리가 어렵고, 버스가 노선을 우회해야 한다며 난색을 표하면서 다시 논란은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공원으로 변모하든, 혹은 다시 고가도로의 위상을 갖추게 되든 서울시와 상인 간 하루속히 접점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야 늙고 병든 서울역 고가도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겠죠.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미생을 품고서 오랜 시간 고생 많았습니다. 서울역 고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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