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안전망 사각지대’ 8만 대리기사의 눈물
생활고에 자살충동까지…
[헤럴드경제=이지웅 기자] 법과 제도의 사각(死角)지대에 놓여 있는 대리운전기사의 시름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이들은 밖으로는 손님들의 폭언에 자살충동을 느끼고, 안으로는 고용주로부터 각종 비용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며 대리운전과 관련한 법과 제도 마련을 호소하고 있다.

KTX 하루 이용객의 3배가 넘는 48만명이 매일 대리운전을 이용하고 있고, 8만명 이상이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잇고 있지만, 이들을 각종 불합리한 행태에서 보호해줄 수 있는 법안은 수년째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사진=헤럴드경제DB) 대리운전기사들은 “밖으로는 손님들의 폭언에 자살충동을 느끼고, 안으로는 업체 등의 각종 비용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며 대리운전과 관련한 법과 제도 마련을 호소하고 있다.

대리운전 경력 2년차 이모(49)씨는 지난 3월 30대 회사원 두 명을 서울 종각역에서 태웠다. 신촌에 들렀다가 목적지인 일산으로 가자는 요구에 이 씨는 경유지가 있을 경우 5000원의 추가로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젊은 손님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며 막무가내로 버텼다. 이씨는 운전내내 “우리는 나잇살 먹고 남의 차 운전하지 말자” 등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 꾹 참아야 했다.

이씨는 “대리운전은 밀폐된 공간에서 주로 술 취한 손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몸은 둘째 치고 마음이 무척 힘들다”고 했다.

평소 자신이 다니는 길로 가지 않는다며 운전 내내 욕설하는 손님, 자신의 위치를 잘 찾지 못한다며 행패를 부리는 손님, 잔돈을 동전으로 던지는 손님도 부지기수다.

문제는 이런 행태의 폐해다.

연세대 의대가 대리기사 166명의 직업환경을 면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손님으로부터 10회 넘게 폭언을 들은 경우 자살을 생각했다는 응답자가 절반(45.3%)에 육박했다.

10회 미만 폭언을 들은 경우에도 10명 중 2명(19.1%)이 자살을 생각했다고 했다.

지난 1년간 폭언을 경험한 비율은 90%에 달했고, 폭행을 당한 비율도 절반에 가까운 41%나 됐다.

특히 이 같은 폭언, 폭력이 운전에 방해가 됐다는 응답도 84%에 달하는 등 도로 안전에도 큰 위협이 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윤진하 연대 의대 직업환경의학 교수는 “대리운전기사는 운수업의 특성뿐 아니라 감정노동, 야간노동의 요소를 갖고 있다”며 “이들의 노동 환경 개선 문제는 사회 안전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구조적인 데에 있다.

대리운전기사의 모임인 사단법인 전국대리기사협회는 대리업체, 보험사 등이 부과하는 각종 불합리한 비용 등을 첫 손에 꼽는다.

대표적인 것이 베일에 가려진 대리운전자보험료 문제다.

(사진=헤럴드경제DB) 대리운전기사들은 “밖으로는 손님들의 폭언에 자살충동을 느끼고, 안으로는 업체 등의 각종 비용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며 대리운전과 관련한 법과 제도 마련을 호소하고 있다.

협회에 따르면 대리기사는 반드시 대리운전자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국내에는 6개 보험회사에서 이 보험을 취급한다. 그런데 지난 4월 시장의 80∼90% 점유하고 있는 삼성화재, 동부화재, LIG보험 등이 보험료를 50% 이상씩 인상한다고 통보했다.

협회 문의 결과 보험료를 57.5% 인상한 삼성화재의 경우 연간 65만원, 78만원이던 보험료가 각각 102만원, 123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보험사들은 보험료 인상 이유에 대해 “받은 보험료보다 지급한 보험료가 많아 적자를 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단숨에 보험료를 50% 넘게 올리는 것은 비정상적 처사”라고 협회 측은 반발하고 있다.

이것 말고도 대리운전업체들이 보험의 개인가입을 허락하지 않고 업체를 통한 단체가입만 허락하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대리기사가 ‘오더’를 더 많이 받기 위해 2∼3곳 대리업체에 소속돼 있다면 보험료를 2∼3곳 업체에 다 납부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업체 측은 “관리의 편리함”을 이유로 보험의 개인 가입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김종용 사단법인 전국대리기사협회장은 “업체가, 대리기사와 보험사 중간에서 보험료를 일부 떼어먹기 위해 개인 가입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업체는 대리기사들의 진짜 보험료가 얼마인지 알 수 있는 영수증은 대리기사에게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김 회장은 “그러다 보니 50%가 오른 보험료를 70%가 올랐다고 뻥튀기해서 차액을 업체들이 임의로 가져가는 일도 벌어졌다. 보험료를 마치 눈 먼 돈처럼 착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험사도 이런 업체에 손발을 맞추는 모양새다. 김 회장은 “최근 이 문제로 금융감독원이 협의 자리를 마련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보험사 측이 대리기사들의 보험료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다.

즉, 실제 보험료가 얼마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업체와 보험사는 정체불명의 금액만 불러주고 무조건 내라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보험료 문제 외에도 업체 등이 부과하는 각종 벌과금, 비용 등도 대리기사를 부당하게 쥐어짜는 요소들이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대리운전업을 감시하거나 보호하는 법과 제도가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대리운전이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30여년 전인데 그 기간 법과 제도가 전혀 시장을 정비하지 않아 시장이 왜곡될 만큼 왜곡됐다는 것이다.

국회에선 대리운전과 관련한 법안이 현재까지 총 4개 발의됐다.

지난 2월 김윤덕 의원이 대표발의한 최근 법안을 포함, 2013년에는 문병호, 이미경 의원이, 2012년에는 강기윤 의원이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들은 수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이다.

대리기사는 사고가 발생해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노동관계법상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업체에서 건당 돈을 받는 개인사업자로 보는 것이다.

더욱이 대리운전업체를 설립하는 데에도 아무런 제약조건이 없어 불량 업체들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현재 대리업체는 3851개, 대리기사 수는 약 8만7000명이다. 대리운전 이용자는 하루 평균 48만명이다.

대리기사들은 한 달 평균 200만원을 버는데 대리업체에 수수료(수입의 약 20%)를 내고 보험료, 교통비 등을 빼면 손에 쥐는 돈은 약 150만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plato@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