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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농 ‘징병제옹호’ 직접 쓴글 아니다” 일제치하 ‘실력양성론’도 재부각
백농 모르게 서무실직원이 작성…일부 친일행적 논란 잠재워
안천 서울교대 명예교수 밝혀


교육부가 지난 3월 ‘이달의 스승’으로 선정한 백농(白農) 최규동의 ‘친일행적’을 일각에서 문제삼는 가운데, 당시 일제 관변잡지 ‘문교의 조선’에 실린 징병제 옹호 글이 백농이 직접 쓴 게 아니라는 진술이 나왔다.


1942년 6월호에 실린 ‘죽음으로 군은(君恩)에 보답하자’는 제목의 글과 관련, 안천 서울교대 명예교수는 “당시 이 글은 백농 선생 모르게 서무실 직원이 써서 주었다”고 말했다.

중동고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안 교수는 50여년 전, “작고한 선배 교사인 장재순 씨와 이 사안을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며 “장재순 선생의 전언에 의하면 당시 총독부에서 하도 극악하게 요구해와 백농 선생 모르게 서무실 직원이 써 주어버렸다”고 밝혔다.

‘징병제 옹호’는 백농이 1949년 초대 서울대 총장에 임용될 때도 걸림돌이 됐으나 백농이 직접 쓰지 않은 것으로 해명이 돼 넘어갔다.

“반민특위가 거세게 활동하던 때 만약 백농 선생께서 친일을 했다면 그냥 있었겠느냐”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문교의 조선’에 실린 문제의 글은 당시 서울의 4개 사립학교 교장과 함께 기고한 4편 가운데 하나로 백농만 ‘경성중동학교 최규동’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실었고 나머지 3명의 교장은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게재했다.

이 사안은 학계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다. 백농은 엄혹한 일제치하에서 사립학교를 운영하는 현실적 대안으로 ‘실력양성론’을 내세웠다.

김경미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학교운영 논리와 파시즘 교육체계-한 실력양성론자의 사립학교 경영을 사례로’라는 논문을 통해 “일제 강점하에서 사립학교를 운영했던 사람의 경우, 식민지 교육체제 하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더이상 학교를 운영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는 많은 조선인 청년의 교육 기회를 잃게 하거나 또는 일제 식민지 교육에 철저히 노출시키는 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입장은 ‘선실력 후독립’의 실력양성론의 입장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한 중동 졸업생의 구술을 인용, “일제가 교사들에게 국방색 국민복 착용을 강요했을 때 일부 교사들이 반발했지만, 최규동은 ‘내가 할 수 있는데까지 한다. 폐교당하는 것보다 낫다’며 입었다”고 전하고, “최규동의 원칙은 중동학교를 조선인에 의해 운영되는 사립학교로 유지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가 조사해 밝힌 1943년 5월말 현재 경성시내 남자 고등보통교육기관의 교직원수 및 학생수를 보면, 경기공립중학교의 경우 조선인 교사가 27.5%, 경복 공립중학교가 15.6%에 불과한 반면, 중동학교의 경우 93.1%에 달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김 교수는 “조선 청년들의 실력양성을 통해 언젠가 이루어질 독립을 준비한다는 실력양성론의 방법은 사립학교 존재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며, “최규동은 일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겪으며 자신의 교육 이상을 실천하기 위한 교육 자율성의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의 교육 이상은 한 사람이라도 많은 청년을 조선인의 손으로 가르치기였다는 것.

김 교수는 결론적으로 식민당국의 교육정책에 대한 ‘적극 협력’부터 ‘최소한 순응’까지의 스펙트럼 밖의 선택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스펙트럼 내에서의 선택이 모두 기존의 ‘저항과 친일’의 평가구도에 따라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생존 방식의 다양한 층위가 갖는 차이를 간과함으로써 오히려 ‘적극 협력’쪽의 책임을 모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최소한 순응’쪽이 지닌 의미를 외면하게 된다며 이분법적 대립 시각을 경계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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