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147일간의 세계여행] 15. 기차타고 38시간…멀고 먼 첸나이
[HOOC=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바라나시 무갈 사라이 역에서 첸나이 센트럴 역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여행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구간이 아니어서 온통 인도사람들 뿐이다. 먼 거리 이동이라 38시간이나 가야하는데 과연 잘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남인도 가는 기차라 아무래도 장거리 이동이 많은 것 같다. 커다란 짐을 가지고 탄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같은 칸에 남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 여자도 있어서 위안이 된다.

자리는 이층으로 나눠진 창가 쪽 위층이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불편하지만 아래보다는 위층이 더 안전한 느낌이 든다. 큰 배낭을 아래층 의자 밑에 묶고 있는데 누군가가 배낭을 내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나와 같은 여행자다. 이 많고 많은 인도인 틈에서 동양인 여행자와 위 아래층을 같이 쓰다니 너무 너무 반갑다. 기차 예매할 때 직원이 그렇게 배치해 준게 아닐까 싶다. 우연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건 행운이다.

온종일 흔들리는 기차 안에 있다는 것은 죽도록 힘든 일은 아니지만 무료한 일인 건 확실하다. 혼자 38시간을 어떻게 가나 했는데 같은 여행자인 동행을 이렇게 극적으로 만나니 숨통이 트인다. 미키는 미국에 사는 홍콩출신 중국인 뮤지션이다. 손질도 잘 하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에 깡마른 체구지만 씨익 미소 지을 때면 한없이 너그러워 보인다. 그에겐 커다란 배낭과 작은 배낭 말고 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쿨렐레다. 심심한데 한 번 연주해 달라고 하니까 이런 분위기에선 싫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사실 지금의 기차안은 어수선 그자체라서 그의 말에 수긍이 간다. 그는 우쿨렐레 연주자다. 아마추어 연주가가 아니다. 지금은 인도의 벵갈루루라는 도시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러 가는 중이다.

지금 바라나시에서 첸나이까지 38시간을 가는데 미키는 한술 더 떠서 벵갈루루까지 46시간동안 기차를 타야한다. 기차안의 화장실에 갈 때도 서로에게 짐을 맡기고 다녀오면 되니 편하고 걱정이 없다. 심심할 땐 이야기를 나누고 가져온 과일이나 과자도 나눠 먹는다. 이 긴 기차여행에서 이렇게 동행을 만나다니,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도 나를 행운이라고 여긴다.

건장한 스물 두 살인 미키는 기차 안에서 파는 도시락을 사먹으며 내가 잘 안 먹는다고 걱정도 해준다. 평상시에 음식을 먹는 양이 적은데다가 속이 별로 좋지 않아서 준비해간 물과 비스킷, 과일로 버티는 내 모습이 안돼 보이는 것이다. 그런 그의 염려가 고맙기만 하다.

그러는 사이 기차의 옆 칸에서 어떤 소녀가 나에게 눈을 반짝이며 달려와 말을 건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 한국은 어디에 있는지, 나이는 몇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아는 영어를 총 동원해서 호구조사를 한다. 귀여운 이 소녀는 12살이고 부모님과 오빠와 첸나이로 가는 중이다. 옆 칸에 있다가 화장실 가는 나를 보고 따라온 거다. 영어는 학교에서 배웠고 오빠는 왜 안 오냐니까 오빠보다 자기가 영어를 잘한다고 자랑한다. 게다가 오빠는 부끄러워한다고 한다.

기차안의 어른들은 힐끔거리며 눈치만 보는데 이 아이의 호기심이 너무 예쁘고 반갑다. 이름은 잊었지만 이 소녀는 기차에 있을 동안 서너 번을 더 내 자리에 놀러온다. 한번은 부끄럼쟁이 오빠를 기어이 끌고 와서 인사를 시킨다. 또 한 번 왔을 땐 내가 미혼이라고 하니 눈이 동그래지면서 인도에서는 여자가 18살이면 결혼을 하는데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천진한 모습이 너무나 귀엽다. 한국에서 가져간 볼펜과 엽서를 선물해주니까 고마워하며 엄마한테 자랑하러 또 달려간다. 

어둠이 찾아왔다. 잠자리에 좀 일찍 눕는다. 낮의 소란스러움은 밤이 되자 잦아든다. 바라나시를 떠올리게 된다. 우연히도 바라나시에서 만난 스물 두 살 짜리 청년 세 명. 구두는 갠지즈강의 가트에서 배를 젓는 보트맨이고 학교라고는 가본 적이 없다. 료는 교사부부의 아들로 일본의 명문대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다. 미키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중국인인 뮤지션이고 음악교육을 한다. 그들을 동시에 만난 것은 아니다. 밤에는 바라나시의 호텔에서 료와 일본친구들과 술 마시며 웃어댔고 아침이나 낮에는 가트에서 구두와 이야기를 하거나 강변을 걸었다. 교육도 못 받고 거리에서 자란 구두는 읽고 쓰는 건 못해도 영어 일본어를 먹고 살만큼은 구사하고 한국어도 몇 마디 할 줄 안다. 료는 영어공부가 부족하다며 다음 달엔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한다. 미국 사는 중국인인 미키는 자기가 홍콩 사람이라 영어 발음이 나쁘다고 이야기한다.

다르게 살아왔을 스물 두 해의 그들의 삶이 이 밤 흔들리는 기차의 리듬에 맞춰 머리 속에서 교차된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눈앞의 현실도 무시할 수는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눈 앞의 현실을 무시한 사람일까 용기있는 사람일까 생각이 많아진다. 깊이 잠들수도 깨어있을 수도 없던 몽롱한 밤, 자꾸만 가난하고 형제 많은 구두가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구두는 분명히 괜찮다고, 바라나시가 좋다고 했는데. 괜찮다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권리가 내게 있을까?

기차는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이렇게 24시간이 지나고 있다. ​온종일 흔들리는 기차, 흔들리는 사람, 흔들리는 생각.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