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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ople & Story] 시어머니 이어 2대 침선장 구혜자씨가 말하는 침선장의 세계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안중근의 마지막 옷을 재현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자료를 찾고 책을 읽어봤는데 다양한 옷이 있더라고요. 그의 ‘마지막 흰 옷’은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옷을 지었어요.”

지난 3월 14일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 ‘한국문화의 날’ 행사에서는 특별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인 구혜자(74)씨가 재현한 105년 전 ‘안중근의 흰 옷’을 이기웅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 이사장이 입고 안중근의 정신을 기리는 퍼포먼스를 펼친 것. 이 옷은 구 침선장이 안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사형당할 때 입었던 걸 사진을 근거해 재현해냈다. 이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는 닷새 동안 횟대에 걸려 전시장을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통옷을 주제로 한 한국관에는 구혜자 침선장이 만든 조선시대 선비옷인 학창의와 도포, 복건, 장보관, 유건, 세조대, 행전 등이 함께 전시됐다.

그의 반짓고리에는 고운 색색의 실이 둥그렇게 감겨 바늘에 꿰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중 녹색 실을 골라 바늘에 꿰었다. 작은 바늘 구멍을 찾느라 눈을 조리개 맞추듯 할 필요없이 바늘 꿰어주는 도구를 사용했다. 그리고 왼손에 짓다 만 고운 색동저고리를 들고 솔기를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침선의 세월이지만 그는 묵묵히 조심스럽게 바느질을 이어갔다. 사진=윤병찬기자/yoon4698@heraldcorp.com

바늘과 실을 한땀 한땀 이어 옷을 짓는 일이 일상이 된지 30여년이 돼 가지만 구 침선장은 여전히 한복을 짓는 일이 어렵다. 이는 우리 전통옷의 오묘함과도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 전통옷의 신기로움은 평면적이면서 입체적인 데 있다. 벽에 펴서 붙여놓으면 도화지에 그린 그림마냥 영락없는 평면이지만 입체적인 몸에 편하게 걸쳐진다. 바느질이 고운 이들은 신체 각 부분의 적당한 품을 잡아내 몸에 맞춤하면서도 움직이기 편하게 옷을 짓는다. 한복의 선은 직선처럼 보이지만 곡선이 숨어있다. 그래서 뻗뻗하지 않고 몸의 리듬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태를 만들어간다. 

그의 반짓고리에는 고운 색색의 실이 둥그렇게 감겨 바늘에 꿰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중 녹색 실을 골라 바늘에 꿰었다. 작은 바늘 구멍을 찾느라 눈을 조리개 맞추듯 할 필요없이 바늘 꿰어주는 도구를 사용했다. 그리고 왼손에 짓다 만 고운 색동저고리를 들고 솔기를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침선의 세월이지만 그는 묵묵히 조심스럽게 바느질을 이어갔다. 사진=윤병찬기자/yoon4698@heraldcorp.com

그런 침선을 여인들은 따로 배우기보다 안방에서 곁눈질로, 눈대중으로 자연스럽게 익혀나갔다. 눈썰미가 좋으면 바느질도 빨랐다.

구 침선장도 그렇게 시어머니 정정완 선생으로부터 바느질을 배웠다. 시어머니는 다름아닌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맏딸이다. 정정완 선생은 열 일곱살에 광평대군 가문의 외아들 이규일과 혼인하면서 사대부 가문과 왕실 가문의 침선울 두루 몸에 익혔다. 정 선생은 당시 사대부 집의 예를 갖춘 의복을 제대로 지을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화여대 대학원 학생들에게 도포 짓는 일을 지도하기도 했을 정도다. 구 침선장이 시어머니 정정완 선생의 침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건 1988년 시어머니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으로 처음 지정되면서다.

“당시에 시누이, 동서와 나란히 입문했는데 다 그만두고 저만 남았죠. 당시 어머니는 식구들 옷을 계속 지으셨어요. 가령 시동생이 외국 나갈 때라든지, 집안 대소사에 한복을 새로 지어야 할 때 ‘도와라’하시면 곁에서 돕곤 했죠.”

그의 반짓고리에는 고운 색색의 실이 둥그렇게 감겨 바늘에 꿰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중 녹색 실을 골라 바늘에 꿰었다. 작은 바늘 구멍을 찾느라 눈을 조리개 맞추듯 할 필요없이 바늘 꿰어주는 도구를 사용했다. 그리고 왼손에 짓다 만 고운 색동저고리를 들고 솔기를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침선의 세월이지만 그는 묵묵히 조심스럽게 바느질을 이어갔다. 사진=윤병찬기자/yoon4698@heraldcorp.com

처음 바느질을 배울 때는 눈물을 쏙 빼는 일도 적지 않았다. 처녀 때 어머니가 지어준 통치마 한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지어본 적은 없었던 터라 모든 게 서툴렀고 배우는게 쉽지 않았다.

“옷감 한동 잘라 오너라”

시어머니의 주문에 한 동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허둥대고 옷감을 접은 부분을 싹둑 잘라가는 바람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가 이러면서 배워야 하나’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은 그때 뿐, 발은 부지런히 문지방을 넘나들었다. 시어머니와 따로 살 때도 그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열심히 들낙거렸다. 시어머니께 배우는게 두렵고 어려웠지만 남편의 지원 덕에 지속할 수 있었다.

한번은 지역의 한 향교로부터 한복 10벌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열심히 마름질하고 자르고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타 부타 말 한마디 없으시던 어머니는 10벌을 다 끝내자 물끄러미 보고 계시다 한 마디 던지셨다. “흉내는 냈다.”

여간해서 칭찬을 하지 않는 어머니로서 최고의 칭찬이었고 그가 들은 유일한 칭찬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런 어려운 과정이 있어야 깨닫게 되는 것도 있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 추상같던 어머니 말씀이 요즘 새록새록 다가온다. “옷감을 아껴 써라, 가위질을 잘해라”는 말을 자주 들었거든요. 그땐 왜 당신 물건도 아닌데 저러실까 했는데 어머니 말씀이 다 맞더라고요.”

시어머니는 많은 후배들을 가르치고 2007년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구 침선장은 2007년 7월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침선장 보유자로 인정돼 대를 이어 침선 기능을 전수하고 있다. 2대 침선장이 되기까지 여느 중요무형문화재 기능장과 마찬가지로 오랜 수련의 과정을 거쳤다. 전수생 5년에 실사를 거쳐 이수자로 지정되면 또 실사를 거쳐 전수 조교로 보유자를 돕게 된다. 그도 이 과정을 거쳐 어머니 밑에서 전수 조교로 95년부터 조교로 죽 일을 돕다가 2007년 보유자가 됐다. 어머니 곁에서 배운 것들은 많지만 요즘 그는 침선을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눈감고도 한다고 하는데,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시간만 나면 작품 하나 하나를 다시 하고 싶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게 많아요. 모를 때는 안보이는데… 이제 바느질이 뭣이란게 보이니까 좀더 섬세하고 아름다운 바느질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천의무봉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반짓고리에는 고운 색색의 실이 둥그렇게 감겨 바늘에 꿰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중 녹색 실을 골라 바늘에 꿰었다. 작은 바늘 구멍을 찾느라 눈을 조리개 맞추듯 할 필요없이 바늘 꿰어주는 도구를 사용했다. 그리고 왼손에 짓다 만 고운 색동저고리를 들고 솔기를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침선의 세월이지만 그는 묵묵히 조심스럽게 바느질을 이어갔다. 사진=윤병찬기자/yoon4698@heraldcorp.com

옷만 침선이 아니다. 이불, 규방공예, 누비도 침선이다. 말하자면 과거 의식주 중 의생활 전반에 해당되는 게 모두 포함된다.

“바느질이란 게 기능이라 자꾸 하면 늘고 섬세해지지만 옷의 다양한 구성을 파악하는 건 계속해야 돼요, 우리 옷은 너무 다양해서 배우는데 끝이 없어요. 아직도 습득할 게 많죠.”

그에게 침선이란 무엇일까. 그는 “그저 옷을 짓는 일이다”고 했다. “고된 작업이잖아요. 희열을 느낀다든지 그런 거 없어요. 작업하면 그냥 짓는거죠. 다른 생각이 안들어요”

그런 그에게도 옛 사람의 옷을 재현할 때는 특별한 감정이 꽉 차오는 걸 느낀다. “제자들하고 남들은 볼 수 없는 출토복식을 보고 재현한다든지, 영조대왕 도포를 원본에 가깝게 정성을 다해 재현한다든지 하는 흔치 않은 일을 할 때는 그런 기쁨이 있어요.”

최고의 침선장이라면 브랜드나 공방하나 있겠지 싶지만 의외로 따로 경영하는 건 없다. “사람들은 화려하고 난한 걸 좋아하잖아요.” 그가 짓는 전통 그대로의 한복보다 화려하고 마케팅의 힘을 빌린 상품들에 사람들은 더 눈길을 준다는 얘기다. 전통 그대로를 지켜내는 일은 수고롭고 쓰다. 그래도 그는 바느질은 물론 염색도 옛 방식을 고수한다. 그래서 색이 나대지 않고 차분하고 어지럽지 않다. 그렇게 한점 한점 만든 작품들을 그는 고스란히 갖고 있다. 팔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한번 팔고 나면 다시 지어내기가 힘들다는 걸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전통 복식 가운데 가장 매력을 느끼는 옷은 조선 사대부들의 옷이다. 위엄과 점잖음이 옷에 흐르면서도 멋과 실용성을 놓치지 않은게 사대부들의 옷이다. 사대부 가문답게 시어머니 정정완 침선장이 가장 맵씨있게 지은 옷도 사대부의 옷이었다. “우리나라는 사대부들의 옷이 발달했어요. 특히 윗옷 포가 다양한데 시대별로 외형이 조금씩 달라요. 조선말기에 와서 대원군이 복식 간소화를 하면서 많이 없어져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됐는데 아쉽죠.”

그의 반짓고리에는 고운 색색의 실이 둥그렇게 감겨 바늘에 꿰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중 녹색 실을 골라 바늘에 꿰었다. 작은 바늘 구멍을 찾느라 눈을 조리개 맞추듯 할 필요없이 바늘 꿰어주는 도구를 사용했다. 그리고 왼손에 짓다 만 고운 색동저고리를 들고 솔기를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침선의 세월이지만 그는 묵묵히 조심스럽게 바느질을 이어갔다. 사진=윤병찬기자/yoon4698@heraldcorp.com

한복의 매력은 잘 갖춰입었을 때 더 품위가 돋보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왕의 경우, 바지 저고리 위에 중치막을 입고 포 종류 하나 더 입고 철릭, 답호, 직령포, 달영 위에 각띠를 매게 돼 있다. 그렇게 겹겹이 입은 위에 각띠를 걸치면 각띠가 착 몸에 앉게 돼 있다.

TV 사극의 주인공들을 보면 각띠가 덜렁덜렁하는 모습이 쉽게 보이는 데 이는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침선을 배우는 학생은 많다. 그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침선반에서 1년에 80명씩 가르친다. 다양한 연령층에 바느질을 배우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취미삼아, 딸의 혼례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자신의 치마저고리를 지어 입어보고 싶어서, 또 한복에 대해 깊이 알고 싶다는 이들도 있다.

침선장 보유자로서 그는 일년에 한 차례 작품 시연회를 갖는다. 지난해에는 의관을 정제할 때 쓰던 쓰개를 선보였다. 올해는 배자를 주제로 다양한 멋을 선보일 예정이다. 바느질은 사람의 성정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1대 침선장인 시어머니와 그는 비교되는 걸 어려워했다. “어머니는 정말로 머리와 솜씨가 좋으신 분이에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분이에요.”

그래도 어머니를 이어 침선을 발전시키고 싶어 나름 애쓰는 부분은 있다. 어머니 세대의 가르침이 비논리적이고 감을 익히도록 하는 식인데 반해 그는 정확하게 치수화해 학생들이 알기쉽고 따라하기 쉽도록 바꿨다. ”우리나라 옷은 직선인것 같은데도 곡선이고 곡선 같으면서도 직선인게 특징이에요. 평면을 입체로 만들 때 얼마만큼의 여분을 더해야 하는지 공식화하지 않으니까 어려운 거죠.“ 몇년 전 출간한 ‘한복만들기:구혜자의 침선노트’(한국문화재보호재단)는 바로 그런 노력의 산물로, 제작과정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수치화해 담아냈다.

칠순을 넘어선 구 침선장은 어느덧 그의 스승 시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전통에 대한 고집스러움이 그렇다. 짓다 만 누군가의 색동저고리를 집어 든 그의 손이 다시 바빠진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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