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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빅데이터는 정신을 불구로 만든다, 한병철 교수의 ‘심리정치’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의지도 없고 무감각해 보이는 노동자들이 발을 맞추어 거대한 강당에 입장한다. 그들이 텔레스크린으로 빅브라더의 광적인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한 여성 주자가 사상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강당 안으로 뛰어들어온다. 그녀는 가슴 앞에 커다란 해머를 들고 거침없이 빅브라더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텔레스크린을 향해 해머를 힘껏 던진다. 폭발하며 활활 타오르는 텔레스크린에서 메시지가 뜬다. “1월24일 애플 컴퓨터는 매킨토시를 선보입니다. 이제 왜 1984년이 ‘1984년’과 같지 않은지가 밝혀집니다.”

"'감시국가'라는 용어는 디지털 파놉티콘을 지칭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감정, 오웰의 감시국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유의 감정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심리정치' 중)
애플의 그 유명한 1984년 수퍼볼 광고다. 애플이 스스로를 조지 오웰의 감시국가 ‘1984’의 해방자로 상정한 것이다. 한병철 베를린 예술대 교수는 이 광고를 새로운 패러다임의 통제체제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피로사회’ 열풍의 주인공 한병철 교수가 새 저서 ‘심리정치’(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전작 ‘피로사회’에서 성과사회의 명령 아래 소진돼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투명사회’를 통해 현대의 긍정적 시스템으로 평가받는 투명성이 만인에 의한 만인을 감시하는 통제사회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짚었던 한 교수는 이번 ‘심리정치’를 통해 성과사회의 전형적 모습인 자기 착취를 신자유주의 정치가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한 교수는 오늘날 우리사회를 디지털 심리정치의 시대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심리정치’는 ‘할 수 있다’를 넘어 ‘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창출하고 이용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하는 은밀하고 세련된 신자유주의 통치술이다.

대중은 이 체제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입고 싶은 것을 입고, 소비하고 싶은 것을 소비하도록 방임되고 권장된다. 그리고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한 교수에 따르면 그 자유는 자본이 제공한 착취 가능한 자유, 상업화된 자유, 자본이 만들어준 레디메이드 옵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더 많은 성과는 더 많은 돈을, 더 많은 돈은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한다. 우리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자본에 봉사한다, 자유를 위해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자유롭다는 심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는지 보여주면서 감정, 기분, 흥분 등의 어휘를 엄밀히 구분해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착취하는 개인들의 심리란 지속적이고 객관적인 감정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주관적인 ‘기분’, ‘흥분’이라는 것. 생산수준이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합리성으로 착취할 수 있는 범위가 한계에 이르기 때문에 이제는 ’기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기분, 흥분을 통해 구매를 충동하는 자극을 늘리고 더 많은 욕구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을 소비한다. 기분산업의 호황은 이를 말해준다. 여기에 사유는 없다. 그에 따르면 반성 이전의 충동적 층위에 해당하는 기분을 이용하는게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라는 것이다.


한 교수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빅데이터야말로 심리정치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라고 말한다. 빅데이터는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습관과 행동패턴, 무의식적 욕망까지 읽어내 지배를 위한 지식으로 활용한다. 한 교수는 인간 자체를 양으로 환산하고 측정하고 조종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드는 빅데이터는 인간의 종언, 자유의지의 종언을 초래한다고 경고한다. 인문학도 더 이상 인문학일 수 없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서사를 지니지 않은 빅데이터는 그저 공허한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미국의 빅데이터 기업 액시엄의 사례를 통해 빅데이터가 불러올 새로운 디지털 계급사회에 관해서도 경고한다. 액시엄은 인간들에 점수를 매겨 ‘슈팅스타’에서 ‘웨이스트’까지로 구분한다. 경제적 가치가 낮은 쓰레기 계급은 신용대출을 받지 못하며 배제 당한다.

그렇다면 자유를 위해 자유를 희생하는 순환논리 속에서 자유를 우리 것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교수는 우리 마음 자체가 자본의 인질로 붙들려 착취의 대상이 된 심리정치의 시대에 내면을 비우고 백치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네트워크에 낚이지 않는 자, 정보가 없는 자, 이단아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자유의 그물, 자본의 유혹에 얽혀들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를 스스로 바보가 되는 자라고 말한다.

이번 책은 자유와 정치라는 예민한 주제에 정면으로 다가갔다는 점에서 전작에 비해 직진적이다. 퇴색한 용어인 자유와 정치를 새로운 틀 속에서 재조명함으로써 자유를 다시 묻는다. 독창적 글쓰기와 디지털사회의 정치적 속성과 본질을 명쾌하게 꿰뚫어내는 힘이 긴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심리정치/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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