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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델 카스트로의 연인 ‘레부엘타’, 89세로 일기로 사망...빼어난 미모와 깊은 학식의 ‘쿠바의 여인’
[헤럴드경제=인터내셔널섹션]피델 카스트로(89) 전 쿠바 국가평의회의장의 연인이었던 나탈리아 레부엘타가 89세의 나이로 숨졌다고 쿠바의 독립 인터넷매체인 ‘14이메디오’와 AP통신이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레부엘타는 폐기종을 앓아오다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수도 아바나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으며가족 묘지에 안장됐다. 카스트로의 전기에 따르면 레부엘타는 그가 가장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이다. 빼어난 미모와 학식을 지녔던 레부엘타의 뒤늦은 사망소식에 쿠바는 애도하고 있다. 레부엘타와 카스트로의 깊었던 인연을 소개한다.

▶빼어난 미모와 지적인 여인=금발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레부엘타는 ‘나티’라는 애칭을 갖고 있으며 ‘쿠바의 여인’으로 불릴 정도로 빼아난 미모를 자랑했다. 여기다 학식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혁명에 대한 열정과 의지도 강했던 것으로 피델 카스트로의 전기에는 기록돼 있다.

1925년 6월에 태어난 레부엘타는 아바나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러스턴 아카데미를 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체스넛힐의 천주교 재단 여학교를 다녔다. 또 미국 워싱턴의 머조리 웹스터 칼리지에서 비즈니스 분야를 공부한 뒤 19세 때 쿠바로 돌아와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레부엘타는 22살의 나이에 자신보다 20살이 많은 심장병 전문의와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남편의 생활을 내조하다가 지치면서 당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반정부파에 관심을 두게 됐다.

▶카스트로와의 만남과 헌신=지인의 소개로 피델 카스트로를 알게 된 레부엘타는 자신의 집에 그를 초대한 뒤부터 혁명 과업을 도왔다. 레부엘타는 피델 카스트로가 1953년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몬카다 병영기지를 공격하려고 준비하기 1년 전 그에게 자신의 집을 혁명을 준비하는 근거지로 제공하기도 했다. 또 당시 가지고 있던 돈 6000 달러와 다이아몬드 등 귀중품을 운영자금으로 지원하는 등 혁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던 중 둘 사이는 점차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목숨을 구한 편지= 피델 카스트로가 몬카다 병영 습격에 실패하면서 혁명 동지들이 대부분 처형되고 투옥되자 레부엘타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책과 함께 해변의 추억을 떠올리는 모래 등을 소포로 보내기도 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한 전기문에는 그가 1954년 옥중에서 “나는 지금 너무 뜨겁소. 나에게 편지를 보내 주시오. 당신의 편지가 없으면 난 살 수가 없소”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도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5년 출소한 뒤 부인 디아스-발라르트와 이혼하고 레부엘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피델이 이혼한 이유는 레부엘타에게 보낸 편지 중 한 통이 디아스-발라르트에게 잘못 배달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레부엘타는 이때 딸 페르난데스(59)를 임신했으나 이 사실을 숨겼고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을 다시 준비하기 위해 멕시코로 망명했다. 이후 레부엘타는 20세 연상의 남편과 이혼했고, 남편은 둘 사이에 낳은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카스트로의 바람기=피델 카스트로는 1948년 미르타 디아스-발라르트와 결혼했다가 아들 피델 펠릭스 카스트로 디아스-발라르트를 낳고 1955년 이혼하기 전 레부엘타를 만났다.

레부엘타를 가장 사랑했지만 그 이후에도 레부엘타를 포함해 4명의 여자와 정식 결혼은 하지 않은 채 관계를 맺어 페르난데스 등 8명의 자녀를 더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껄끄러웠던 딸 페르난데스와의 관계=피델 카스트로는 1956년 9월 멕시코 동부 베라크루스에서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 산티아고데쿠바 해안에 상륙해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숨어들면서 본격적인 혁명 투쟁을 시작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멕시코에서 복귀하기 6개월 전에 태어난 페르난데스를 자신의 딸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 페르난데스가 12살이 됐을 때 처음 대면했다. 페르난데스에게 카스트로의 인상이 좋을리가 없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정권을 수립하자 레부엘타는 ‘퍼스트레이디’의 꿈을 궜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는 레부엘타와 거리를 뒀다. 결국 둘은 부부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 딸 페르난데스는 카스트로를 원망스러워했다. 페르난데스는 결국 1993년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했다. 페르난데스는 망명 후 아버지, 피델 카스트로를 ‘독재자’라고 부르면서 쿠바 정권을 비난해왔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레부엘타의 건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해 8월 망명한지 21년 만에 아바나를 방문했다.

▶레부엘타는 카스트로를 원망하지 않았다=레부엘타는 2008년 스페인 신문 라 반과르디아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개인의 삶보다 혁명 과업을 우선시한 것을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내 맘 속에서 그를 지우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smstor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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