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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은 왜 조선인 군위안부의 실체를 부정할까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추업을 목적으로 하는 부녀 약 사백명을 비밀리에 선정 도항하도록 배려해줄 것. 각 지방청에 통첩하여 긴밀히 적당한 인솔자를 선정하도록 할 것, 남지 방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추업을 목적으로 하는 특종의 부녀를 필요로 하나 아직 도항이 없어 현지의 희망에 따라 그 것을 부득이하게 허가하는 것에 대해, 상기에 따라 본건을 극비리에 집행하도록 배려해주기 바람”

1938년 11월4일 남지 방면군(제21군)인 고소부대의 참모인 육군 항공병 소좌 구몬 아리후미와 육군성 징모과장이 내무성을 방문, 제21군의 군위안소 개설을 위해 필요한 약 400명의 군위안부 징모에 협력해줄 것을 요청한 자료다.

내무성이 군 위안부 징모에 관여했으며, 징모에 협력한 사실을 최대한 은폐하고자 했음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일본정부는 군위안부의 징모가 국제법이나 일본의 형법에 저촉될 소지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 군위안부의 최대 관심사는 일본의 법적 책임, 즉 징모에 일본 군부가 직접적으로 관여했느냐다. 일본은 이를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관한 국내 연구도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관련 문헌자료 대부분이 일본에 소장돼 있거나 폐기돼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나마 출간된 책도 일본인 연구자의 번역서인 경우가 대부분인게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 히토쓰바시대에서 9년 동안 이 문제를 연구해온 국내 몇 안되는 조선인 군위안부 전문가인 윤명숙 박사가 펴낸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는 조선인 군위안부가 생긴 배경과 운영 등 조선인 군위안부의 전모를 밝혀내 관심을 모은다. 이 책은 저자가 2003년 일본 아카시서점에서 출간한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어로 번역해 펴냈다.

저자는 일본 내무성의 군위안부 징모방법이 대만의 예에서 보듯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한다. 다만 조선총독부와 조선 내 경찰은 식민지가 국제법의 적용 지역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조심하던 모습과 달리 내무성이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1938년 11월4일 내무성 자료에는 “이미 대만총독부가 그 지역에서 도항할 부녀 약 300명을 수배해 놓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비춰볼 때, 조선의 경우도 각 파견군이 총독부에 요청하고 총독부가 각 도에 배당하면 각 도의 경찰이 업자를 선정해 징모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조선총독부의 관여와 협력 외에도 조선군사령부의 징모가 있었다고 말한다. 동남아시아 번역심문센터 감독관인 미 육군 보병 대령이 1944년 11월에 작성한 ‘심리전ㆍ심문 보고’에는 조선군사령부가 징모업자를 선정한 후 편의를 제공하고 군 위안부 송출에 협력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일본이 노예사냥과 같은 강제연행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저자는 식민지 지배하에서 누가 징집의 주체냐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총독부가 중국 주재 영사관에 파견했던 사무관이 보낸 보고서에 군위안부 이송 및 점령지 군위안소 상태에 대한 내용은 이를 방증한다.

조선인 군위안부의 동원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그렇다면 어떤 여성이 징모업자의 표적이 됐을까. 저자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에서 이뤄진 징모는 징모업자들의 취업사기 형태가 가장 많았다. 또 주로 가난한 농촌 가정의 미혼 소녀가 표적이었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군위안부 피해자 31명 가운데 약 70%가 취업사기로 징모됐다. 관헌의 권위를 등에 업은 징모업자의 사기와 강제, 유괴나 폭력도 10% 이상이었다. 돈을 미끼로 한 여공 취업 등의 취업사기가 압도적이었다.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국가책임과 군위안부의 정의는 강제연행과 같은 한정된 징모형태와 징모과정으로만 한정지어 그 근거를 찾아서는 안된다. 군위안부는 일본 정부ㆍ군의 통제 감독 및 협력을 기반으로 징모되거나 이송되어 군 상층부가 정책적으로 개설 ㆍ운영ㆍ통제ㆍ감독했던 군위안소에 구속돼 성노예가 될 것을 강요당한 모든 여성을 지칭해야 한다.”(‘조선인 군위안부와일본군 위안소 제도’ 본문 중)

저자의 연구 중 눈길을 끄는 부분은 조선인 위안부가 양산된 배경으로 꼽은 식민지 정책에 따른 당시 경제상황이다. 당시 총인구의 80%가 농촌인구였고 , 그 중 70%가 빈농이었다. 농촌 출신 군위안부가 많은 이유다.

저자는 일본 정부의 명백한 책임과 함께 조선인 군위안소 경영자와 관리자, 조선인 하청업자, 조선인 ’인신매매업자‘의 존재에 대한 규명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저자가 일본에서 18년간 연구한 결과물의 집대성인 만큼 분량이 방대하고,논문형식이어서 내용도 딱딱하다. 하지만 군위안부가 어떤 배경에서 생기고 점령국과 식민지에서 어떻게 달랐는지, 또 피해여성들의 당시 사회경제적 배경 등 군위안부를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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