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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왕의 印章’29점…그 많던 국새는 다 어디갔나
문정왕후 어보·현종 어보
65년만에 내달 고국품으로

작년 오바마 국새 9점 환수 물꼬
돌아오는 문화재 높아진 국격 상징

문화재청 국새 전수조사 총 37과
8과는 확인…나머지 29과 행방묘연

국새는 실무용, 어보는 의례용
조선은 거북 모양, 대한제국 용 모양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가 65년 만에 다음달 한국으로 돌아온다. 두 어보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불법 반출한 중요 문화재로 2000년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 박물관(LACMA) 측이 경매시장에서 구입해 보관해 왔다.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지난 2009년 LACMA 소장 사실 확인 후 2011년 6월과 2013년 5월 두 차례 LACMA를 방문해 도난품임을 증명하면서 반환이 이뤄지게 됐다. 이번에 돌아오는 문정왕후의 어보는 거북 모양 손잡이가 달린 금장 도장으로, 도장 찍는 면에 문정왕후의 존호인 ‘성열대왕대비지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잃어버린 국새와 어보에 대한 국민적 관심사가 높아지고 속속 돌아오는 건 그만큼 국격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근ㆍ현대 혼란기에 잃어버린 국새 29과(顆, 인장을 세는 단위)는 여전히 소재 파악조차 안된 상태다.

최근 문화재청이 실시한 국새 전수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기까지 현존해 있었던 전통시대의 국새는 모두 37과로 밝혀졌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면, 조선시대 12과, 개화기 12과, 대한제국기 13과 등이다. 이들 국새 중 조선시대 국새는 2과, 개화기는 1과, 대한제국기는 5과 만이 남아 있다. 따라서 현재 문화재 환수대상으로서의 전통시대 국새는 총 29과인 셈이다. 이들 국새들은 대한제국이 종언을 고한 1910년 이후 분실됐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국내외로 흩어졌다.

국새는 한 나라의 국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품이다. 최근 조선시대와 대한제국기에 사용한 국새들이 속속 귀환하면서 국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혼란기 잘 간수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동시에 자랑스런 문화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65년만에 고국으로 반환되는 문정왕후 어보

그 많던 국새는 어디갔나

문정왕후 어보의 반환에 앞서 지난해 4월 오바마 대통령 방한시 국새와 어보 9과가 반환돼 관심을 모았다. 돌아온 인장은 한국전쟁 기간 한 미군이 덕수궁에서 불법 반출한 것으로, 대한제국 국새인 ‘황제지보(皇帝之寶)’를 비롯, 조선 왕실에서 관리 임명에 사용한 ‘유서지보(諭書之寶)’, ‘준명지보(濬明之寶)’ 등 고종의 국새 3과와 순종이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1907년 제작한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 등 어보 6과 등 모두 9과였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황제국에 걸맞게 새로운 국새를 제작했다.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지새(皇帝之璽)’‘황제지보(皇帝之寶)’3과,‘제고지보(制誥之寶)’‘칙명지보(勅命之寶)’ 2과,‘흠문지새(欽文之璽)’‘대원수보(大元帥寶)등 10과가 제작됐다.

이 국새 중 상당수는 모두 한일합방과 함께 1911년 3월3일 천황의 진상품으로 바쳐져 일본 궁내청으로 들어가는 모욕을 겪었다. ‘순종실록’에 따르면 이왕직 차관 고미야 사보마쓰가 ‘옛 국새와 보새를 총독부에 인계했다’는 기록이 있다.

8.15 해방 1년 후인 1946년 8월15일 미군정은 궁내청에 소장된 대한제국 국새를 모두 인수, 한국에 정식 인계했다. 이 때 반환된 국새는 ‘대한국새’‘황제지보’‘제고지보’‘준명지보’(2점) ‘대원수보’로 순종실록에 기록된 목록과 일치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이 가져간 국새는 일단 국내로 돌아온 셈이다.

1948년 7월2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과도정부가 대한민국 총무처에 이전한 물품목록에는 대한제국 국새의 목록이 일본에서 환수한 목록에 ‘내각총리대신장’과 ‘내각지인’이 추가됐다.

이후 총무처에서는 1949년 2월3일부터 열흘 간 되찾은 국새를 대한제국 조약문서들과 함께 국립박물관에서 특별전시했다. 그러나 전시회가 끝난 뒤 총무처에서 관리하던 시기에 6.25전란을 겪었고, 전쟁의 와중에 국새를 모두 유실하게 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반환한 ‘황제지보’ 또한 전란 당시 잃어버렸던 국새 가운데 하나다. 그 뒤 1954년 6월 잃어버렸던 ‘대원수지보’‘제고지보’‘칙명지보’등 3과는 경남도청 금고에서 발견됐다. 고종이 일본에 빼앗긴 국새 대신 비밀리에 만들어 사용했던 ‘황제지새’는 2009년 재미교포에게서 구입,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대한제국 이전, 개화기에 새로 만든 국새도 6과가 있었다. 갑오경장을 전후해 조선은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끝내면서 종전의 책봉에 의한 국새인수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국내에서 자체 제작해 사용했다. 일본과의 관계에선 1876년(고종13)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국새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1881년 고종은 기존에 신사가 가지고 가는 국서에 ‘위정이덕(爲政以德)’보를 쓰지 말고 ‘대조선국보’를 제작해 쓰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8년 후인 1889년 ‘대조선국보’를 포함, ‘대조선국대군주보’‘대군주보’‘대조선국주상지보’‘대군지보’‘대조선국수상지보’등을 제작했다. 이 외에 ‘준명지보’‘동문지보’‘흠문지보’‘명덕지보’‘광운지보’도 제작했다.

왕실의 각종 의례용으로 제작된 조선시대 어보는 ‘종묘등록’에 따르면 총 374과가 만들어졌다. 이 중 정종어보, 태종어보 등 2과는 1909년 종묘등록에 존재하지 않아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1909년 이후 49과가 다시 사라졌고, 49과 가운데 12과는 국내외 소재가 파악된 상태이나 37과는 행방이 묘연하다. 나머지 318과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왼쪽부터)황제어새, 황제지보, 수강태황제보.

국새와 어보 어떻게 다른가?

국새는 국가 최고통치자의 인장인 동시에 국가의 상징으로 왕조에서는 왕위계승의 의미가 컸다. 조선시대의 외교용 국새는 대부분 명ㆍ청의 황제들로부터 받았고 국왕문서용 국새는 따로 제작해 썼다. 행정용 국새는 교명, 교서, 교지를 비롯, 과거 관계의 문서, 국가에서 간행한 서적 등 각각의 용도에 따라 달리 만들어 썼다,

국새가 국가의 공식 문서에 찍는 행정용 인장이라면, 어보는 왕실사람들의 위호나 명호를 새긴 의례물의 성격을 띤다.

어보는 왕비를 비롯, 왕세자, 왕세손과 그 빈들의 책봉, 또 국왕과 왕비 등 왕실의 선조에게 존호를 올릴 때, 또 국왕과 왕비, 상왕과 왕대비 등의 사후 시호를 올리거나 왕이 승하했을 때 만들어 올렸다. 국왕과 등급 신분 이상은 ‘보’, 그 이하는 ‘인’으로 차등했다. 책봉명이나 존호, 시호, 묘호 등과 같은 호칭을 새긴 어보를 해당 인물에게 수여하거나 올리는 일은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였으며, 사후에는 신위와 함께 종묘에 봉안됐다.

조선시대 어보의 손잡이(뉴식)는 대부분 거북 모양으로 대한제국 이후에는 거북과 함께 황제국을 의미하는 용 모양을 함께 썼다. 인장에서 거북은 신하의 도리를 의미한다. 명ㆍ 청에서 받은 국새 6과는 모두 거북 모양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전, 한국의 중세 고대에는 낙타 모양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국새 하나 제작에 장인 54명

국새제작은 모두 54명의 장인이 동원될 정도로 복잡하고 공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전문서사관이 쓴 글자를 베끼는 사자관을 비롯, 전각할 수 있도록 베낀 글자를 앉히는 화원, 금속어보를 전각ㆍ조각 주조하는 보문각장, 쇠붙이나 가죽을 장식해 호갑을 만드는 호갑장, 쇳물을 녹이고 주물하는 소로장, 국새를 넣는 호갑을 이동할 때 메는 큰 끈을 만든 담편장 등 54명의 장인이 동원됐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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