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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성영화 같은 사진…존재하지 않는 순간을 포착하다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싸구려 조명이 둘러쳐진 서커스 천막 앞. 분장한 사내가 구겨진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있다. 컷. 들고 있던 수트케이스 안으로 몸을 구겨 넣는다. 컷. 신사는 사라지고 수트 케이스 안에는 신사의 구겨진 양복과 중절모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컷.

6점의 사진 연작은 이탈리아 사진작가 파올로 벤츄라(Paolo Venturaㆍ47)의 작품 ‘가방 속의 남자(Man in the Suitcase)’다. 6장의 스틸 컷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뚝뚝 끊어지듯 연결되는 초당 16프레임 짜리 무성영화를 연상케 한다. 연극적인 무대, 사진 속 배우의 모습에서도 페이소스(Pathos)가 묻어난다.

파올로 벤츄라의 국내 세번째 개인전이 ‘짧은 이야기들(Short stories)’이라는 타이틀로 지난 4일 갤러리바톤(서울 압구정로)에서 열렸다. 주로 패션 사진을 찍어 오던 벤츄라는 10년 전부터 사진작가로 전업, ‘디오라마(diorama)’ 기법을 활용해 사진이라는 장르에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풀어놓고 있다. 디오라마란 배경을 그린 길고 큰 막 앞에 여러 가지 물건을 배치하는 것으로, 19세기에는 이동식 극장 장치를 뜻하기도 했다.

벤츄라는 3차원적 공간 창출을 통해 사진의 평면성을 극복, 사진 영역의 확장을 꾀했다. 회화, 사진, 연극, 영화 등의 요소들을 하나의 ‘결정적 장면’ 속에 버무린 통섭형 예술이다.

벤츄라는 자신이 직접 배경이 되는 이미지들을 유화로 그리거나 제작하고 그 앞에서 연기를 펼친 장면을 다시 사진으로 담는다. 몇 장의 이미지들이 모여 짧은 이야기를 만드는데 이는 마치 기승전결이 뚜렷한 단편소설같은 구조다.

매 작품마다 직접 등장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작가는 이번 작품에 그의 아들과 일란성 쌍둥이 동생을 등장시켰다. 작가 자신을 포함해 자신을 닮은 아들이나 동생 등 가족을 작품에 등장시킴으로써 작품 속에 늘 ‘자기 자신’이 들어가 있도록 만든 셈이다.

‘가방 속의 남자’는 가방 속에 들어가는 묘기를 보여주다가 실제로 사라져 버린 떠돌이 마술사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가 유년 시절 이탈리아 작은 도시에서 자라면서 들어왔던 옛날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왔다. 그런데 가방 속에 들어갔다가 사라지는 일이 실제로 있을 수는 없다. 작가는 실재하지 않았지만 실재했던 것 같은, 마치 구전으로 이어진 이야기들이 실제 있었던 것처럼 믿게 되는 심리를 꿰뚫었다. 

Man in the Suitcase, 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 60x40㎝, 2013 [사진제공=갤러리바톤]

작가는 “영화를 보고 울고, 흥분하고, 감동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사진이 조작됐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믿으려고 한다”면서 이것이 사진 작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작품의 의도와 예술 철학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전시에 앞서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디오라마 기법을 작품에 도입하게 된 배경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것은 지금 현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디오라마를 이용해 가상적이고 영원한 세계를 만들었다.

▶작품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뭔가.

-작품 속에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거일 수도 있고 미래일 수도 있다.

▶‘결정적 장면’은 무엇이며, 그러한 장면을 포착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결정적 장면이다. 상상 속의 영원한 세계랄까.

▶쌍둥이 동생이 등장한 이유는.

-나와 닮은 이와 함께 자라왔다. 마치 거울과 함께 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항상 한 쌍을 이루는 것들에 관심이 있다.

▶무성영화 시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가.

-내 작품이 무언가의 오마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극, 영화 등에서 영감을 받았나.

-연극이나 영화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실존하지 않는 가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유사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전시는 3월 6일까지.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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