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줄탁동시(啄同時)라는 말이 꽤나 일반화 되었다. 기업에서 동기부여를 이야기 할 때, 사제 지간의 배움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또 속도전(速度戰)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의 태도를 지적할 때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알 속에서 병아리가 나오기 위해 껍질을 두드리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작업을 말하며 이것이 동시에 행해져야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칫 이 말을 하면서 껍질 안에서 부르는 줄()과 밖에서 두드리는 탁(啄)을 하는 행동의 동시(同時)성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실재 현실의 일 부분만을 이야기하는 우를 범하게 될 듯하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중요한 건 줄탁동시 보다는 선줄후탁(先後啄)이다. 병아리가 나오기 위해 먼저 부르는 것이 먼저이며(先), 어미 닭이 이를 알아차리고 밖에서 쪼고 두드리는(後啄) 것이 다음이다. 병아리 울음을 듣지 못하고, 알을 깨고 나오려는 몸짓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동시성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태어나지 못하고 병아리는 죽는다.
아프고 고프다고 우는 아이에 눈맞추며 들어주는 부모,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세상에 대해 진지한 의문을 품고 태어나려는 몸짓을 제때에 알아보는 선생,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변화를 모색하는 부하직원에게 반응하는 리더. 이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결코 많지 않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몸짓을 알아차리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알아차릴 수 없는데 어떻게 동시성을 이룰 수 있겠는가?
여러 개 알을 품고 있는 어미 닭이야 이 알 저 알 쪼아대듯 보일지라도 이 역시 본능적이지만 알 속
병아리의 울음에 대한 반응이다. 이처럼 알아차리고 반응하는 것이 먼저이며, 그런 다음 동시에 마주치는 것이 필요하다.
상호 일치가 있어야 알이 깨지고 병아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어미 닭이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병아리는 나오질 못한다. 동시성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병아리는 죽는다. 그러니 때가 되면 병아리가 먼저 부르며, 이를 어미 닭이 듣고 그 반응으로 시기 적절하게 두드린다.
어미 닭이 성급하게 먼저 쪼아 알을 깰 경우에도 여차 없이 실패한다. 병아리는 죽고 만다. 왜냐하면
어미가 껍질을 깼다 하더라도 이를 계기로 스스로 나올 만큼 껍질을 깨면서 힘을 길러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병아리와 어미가 동시에 껍질을 깨뜨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병아리 스스로 나머지를 깨고 나오지 못하면 스스로 날아 오를 초기경험을 통해 역량을 축적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질 못한다. 최초의 몸짓을 출발로 삼아 적당한 외부의 도움을 활용하며 계기를 만들고 스스로 실행을 통해 역량을 쌓지 못하면 서지 못하고 서지 못하면 날지 못하게 된다.
이런 줄탁동시의 평범한 비밀을 구현하고자 하는 리더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의 목소리와 몸짓을 알아차려야 하고(awareness), 필요한 시기를 맞출 수 있어야 하며(timing), 그 개입이 필요한 만큼 상대에게 적절해야(appropriate) 한다. 반대로 줄탁동시를 활용해 변신하고 성장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아픔과 고품, ‘성장하고 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소리를 내야 한다.
자기표현(self-expression)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몸짓을 해야 하고 이런 ‘드러 냄’을 통해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와 계기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스스로 서고 자기 날개 짓을 해야 한다. 경험을 통해서만이 자기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듯이 스스로의 날개 짓만이 날아 오를 수 있게 한다. 이런 양쪽의 노력이 일치해야 변화와 변신, 새로운 태어남이 가능하다.
이렇 듯 줄탁동시의 평범한 비밀이 기업에서 사람 변화의 전략적 초점(strategic fit)이 되어야 한다. 하부 조직과 사람도 변화를 지속하도록 촉진하는 리더라면 선줄후탁(先後啄) 줄탁동시(啄同時)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