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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뜨겁고 치열했던 80년대, 외교관이 돌아본 ‘국제시장’
[헤럴드경제=김상수 기자]“중동 건설 현장을 가면 꼭 서울 같았어요. 네거리 한가운데에 우리 근로자가 군복을 입고 모자를 쓴 채 교통정리를 하고 있고요. 밥을 남겨 모래에 묻고는 술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죠.”

70~80년대는 현대사의 격동기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은 그랬다. 변방 조그만 나라의 설움 속에 뜨겁고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당시 세계무대를 누볐던 외교관의 기록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피보다 진한 땀을 흘렸던 중동, 세계열강의 각축장인 유엔. 이곳에서 격동의 현대사를 보낸 두 외교관이 지난날을 돌아봤다.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외교사연구센터가 발간한 ‘한국 외교와 외교관’을 통해서다.

박동순 전 이스라엘 대사는 요르단, 이집트, 이스라엘 등 중동지역 공관장을 3번 역임한 외교관이다. 70년대 중반 한국기업이 중동에 진출하던 ‘모래바람’을 현지에서 함께 겪었다. 그는 1976년 현대건설의 주베일 항만공사를 예로 들었다. 박 전 대사는 “당시 입찰금액을 9억5000만달러로 썼는데 우리 연간 정부 예산의 25%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며 “다른 나라가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결국 해냈다. 그만큼 우리 기업이 대단했다”고 전했다. 

요르단에서 근무했을 시기에도 요르단 내에 한국 기업의 건설붐은 대단했다. 하수도, 상수도, 학교를 짓는 데에 10개의 기업이 진출했다. 그는 당시 한국기업 한보가 킹 압둘라 운하 내 인공수로를 만들었던 사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운하의 물을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나눠 쓰는데, 요르단 정부가 이스라엘 쪽으로 흐르는 물을 막고자 했죠. 요르단 정부의 긴급 요청으로 한보가 밤에 횃불을 켜놓고 공사를 했어요. 이스라엘 군사들이 와서 총을 겨누기도 했어요. 이 건설로 한보가 요르단 국왕으로부터 큰 훈장도 받았습니다.”

요르단 대사로 부임했을 시기 후세인 요르단 국왕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요르단에선 처음 왕을 만나러 가면 한 두시간은 무조건 기다려야 하는 게 공식 절차”라며 “그냥 앉은 채로 2시간 정도 기다려야 왕이 나온다. 그게 그 나라의 전통”이라고 말했다. 또 “후세인 왕이 한국을 참 좋아했다. 후세인 왕이 방한했을 때에도 3박4일을 함께 다녔는데 참 인자한 분”이라고 회상했다.

쿠웨이트에서 근무할 당시엔 5ㆍ18을 앞둔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현대사의 한획을 중동에서 맞이한 셈. 그는 “최규하 대통령이 갑자기 중동을 방문했는데 이를 두고 군부가 일부러 대통령을 국외로 보냈다는 말이 있었다”며 “쿠웨이트에서 국빈만찬을 열었는데 최 대통령이 말도 없이 계속 음식만 먹었다. 건배하거나 이야기도 없이 음식만 먹었다”고 기억했다. 사실상 만찬이나 방문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는 얘기다. 15일에 쿠웨이트를 방문한 최 대통령은 16일 서울로 귀국하고 이틀 뒤 5ㆍ18이 일어났다.

기억나는 사건으론 1978년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폐쇄사건을 꼽았다. 이에 대해 “국내 기업이 아랍 지역 건설에 대거 뛰어들면서 이에 이스라엘이 불만을 품었던 게 원인이었다”며 아랍권과 이스라엘 사이의 균형외교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수길 전 UN대사는 “1960년대 초 한국이 아주 가난했던 시절 350달러의 월급을 받으며 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LA가 첫 근무지였는데 주유소 직원이 외교관 차의 간판을 보곤 동양인 외교관이 외교관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걸 못마땅해하던 시절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냉전 시기 남북 UN 동시 가입 등을 주도했던 외교관이다. 그는 냉전시대에 한국을 알리고자 물밑에서 뛰었던 경험들을 회고했다. 박 전 대사는 “당시 UN에서 ‘한국과 이탈리아는 항상 승리하고 절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평을 많이 받았다”며 “공산권과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람 대 사람으로 알고 지냈고 개척했다”고 말했다.

박 전 대사는 UN 가입 5년 만인 1996년 한국이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이 성공한 요인으로 “아시아의 경쟁국인 스리랑카의 양보를 유도한게 유효했다”고 전했다.

한국 외교사의 쾌거로 남은 반기문 UN 사무총장 당선 지지활동도 회고했다. 그는 “박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 사무총장직에 나서려 하자 ‘외교통상부 장관직은 내려놔야 한다’는 반발이 일었지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장관직을 유지하는 게 사무총장직에진출할 때 유리하다’는 이유로 이를 유지시켜줬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의 동북아균형자론도 반 총장의 당선에 큰 힘이 됐다는 게 박 전 대사의 설명이다.

외교사연구센터 측은 “냉전 시기 우리 외교 현장에서 가장 뜨거웠던 UN외교와 대중동외교를 기록한 자료로 가치를 지닌다”며 “한국 외교사의 외교문서를 보완하는 사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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