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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비제 르 브룅, 1779년작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그가 남겼다고 회자되는 말입니다. 민중의 아픔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비정한 왕비로 묘사되는 대목이죠. 사치스럽고 방탕한 프랑스 왕실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프랑스 대혁명(1789-1794)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왕비의 책임은 어마어마해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왕비가 큰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고 특별한 실책을 저지른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를 둘러싼 온갖 추문도 그 진원지를 추적해보니 완전히 날조가 되었다고 하죠. ‘빵 대신 케이크’ 발언 역시 사실무근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기도 하고요. 당시 혁명군이 악의적으로 부풀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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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1789년작 |
오히려 왕비는 어머니에게 “가난한 국민을 위해 정치를 펴겠다”는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 연인과 혼외정사를 한다는 둥 동성연애를 한다는 둥 온갖 추문이 그의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까요?
우선 그의 결혼이 어땠나 봅시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인 루이 16세와 결혼을 합니다. 강대국으로 떠오르던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한 정략 결혼이었죠. 그런데 두 나라는 오랜 전쟁을 치러온 앙숙 관계입니다. 프랑스인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오스트리아 계집’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배우자를 잘못 만나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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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1월, 국고를 낭비하고 국가에 대한 음모가 있었다는 죄목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 |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1785) 역시 왕비는 거대한 사기극의 피해자입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로챈 사건이죠. 재판을 통해 왕비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게 가려졌는데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왕비의 침전 상궁이었던 캉팡 부인의 회고록에도 “루이 16세는 이 목걸이를 왕비에게 선물하려고 했지만 왕비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고 나오지만, 아무튼 왕실을 향한 민중의 분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로 쏠리게 됩니다.
더욱이 말입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쓴 왕실 예산은 프랑스 전체 예산의 3%이고, 이 가운데에서도 왕비는 10% 정도만 썼다고 합니다. 검소한 왕비라고도 할 수 없겠지만 희대의 악녀라고 말하기도 어렵지 않을까요.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