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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백년 ‘빈자의 등불’…낮은곳 밝히는 파란눈 신부
탄광촌·달동네서 48년째 ‘빈민사목’의 길 걷는 안광훈 신부, 2014 아산상 대상 영예…“세상이 부자들의 천국돼선 곤란합니다”
파란 눈의 안광훈 신부, 최근 2014년 아산상 대상(大賞)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시상식은 오는 25일 오후 2시 아산생명과학연구원에서 열린다. 2012년에는 서울시 복지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탄광촌 빈민들과의 10년에 이어 판자촌 철거민들과의 38년, 48년째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하며 ‘빈민사목’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안 신부는 ‘달동네 대부’, ‘빈자의 등불’로 통한다. 현재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는 해외선교단체 성(聖)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본부 재정을 담당하는 그는 삼양동주민연대 대표 등 대여섯 종의 명함을 갖고 있다. 며칠 전, 선교본부를 찾아 소회와 소감을 들어 보았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역 4번출구에 있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안광훈 신부.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상부상조 되살리는 ‘마을만들기’ 사업 열중-

선교회 3층 사무실은 단촐 했다. 그런데 벽에 걸린 큼지막한 그림 한 점이 우선 눈길을 끈다. 불교 신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달마법상도(달마도)’. 사제로서의 안 신부의 인품과 정서가 물씬 풍긴다. 한국 부임 초기였던 정선 탄광촌 시절에는 인근 사찰의 스님들과 왕래하며 교류했고 지금도 일부러 시간을 내 유명 사찰을 찾을 정도로 불교에 관심이 많다. 한글이름은 한국에 온 직후 지금의 대학로 주변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서로 배우기 위해 어울린 서울대 학생들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요즘 안 신부는 ‘마을만들기’사업에 무척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네 조상들의 두레나 품앗이로 대표되는 상부상조 정신을 되살리자는 운동이다. 그 것도 서울에서. 이 역시 강원도 오지에서 몸소 보고 듣고 느낀 결과다. “회갑이나 칠순잔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게 되면 마을 사람끼리 힘을 합쳐 서로 도우며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함께 나누는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어요. 한두 번도 아니고 늘 그렇게 하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이런 걸 서울에 전파해 생활화 해보자는 겁니다.” 안 신부는 여러 복지단체와 연대해 관련 교육프로그램도 연구하면서 곧 실행에 옮길 것이라고 한다.

안 신부가 가장 역점을 두는 일이 삼양동주민연대 운영이다. 2006년부터 대표를 맡고 있다. 이 연대는 1997년 IMF외환위기 때 결성됐다. “당시 실직자가 대량 양산되는 상황이 몹시 안타까웠지요. 서울 북부지역(노원·성북·강북)을 중심으로 ‘실업자사업단’을 구성했고, 무너진 가정을 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위해 만든 ‘우렁각시’ 제도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활발합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안 신부는 자활센터인 강북주거복지센터를 만들었고, ‘한바가지’ 소액대출 은행을 설립하기도 했다.

한국생활을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이들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고인이 되신 지학순 주교님과 선우경식 의사를 꼽는다. “지 주교님과는 정선 탄광촌 사목시절부터 인연을 맺었지요. 저의 오늘이 있게 길을 터주신 은인이십니다. 또 선우 의사는 친구 사이로 영등포역 후미진 골목에 프란치스코 무료병원을 설립 운영한 주인공입니다. 가족 모두 미국 이민자로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해 남부러운 입장이었지만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혈혈단신 조국에 건너와 빈자들을 돌 봐 온 한국판 슈바이처라고 할 만합니다.” 


-목동 빈민촌 강제철거 처참…잊을 수 없어-

과거를 짚어 보기로 하자 두 눈을 지그시 감는 안 신부. 우선 1980년대 초반 목동 빈민 강제철거 사건을 떠올린다. “한마디로 처참했습니다. 의지할 곳 없이 하루하루 힘들게 연명하던 불쌍한 이들을 강제로 쫒아내는 모습은 생각조차 싫습니다.” 당시 안양천 주변에 어렵사리 보금자리를 마련해 오염된 하천수로 농사를 지어 겨우 연명해 오던 그들이었다. 그런 삶의 터전이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철거 우선순위로 지목된 것.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게 성당의 문을 열어 주고 다독여 주는 일이었어요.” 안 신부는 빈민운동가들이 인근 시흥에 토지를 매입해 철거민을 위한 ‘목화마을’을 만드는 일에 일조하기도 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오며 어디 한 맺힌 일이 어디 한 둘일까만, 그는 1970년대 초 정선에서 있었던 한 젊은이의 죽음을 회고한다. “병원이 없어 치료도 못 받고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그길로 성프란치스코병원을 세웠던 겁니다.” 그 병원은 없어지고 지금은 정선도립병원이 들어섰다.

좋은 일도 많았다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는 안 신부. “70년대 초반 정선 주민 30여명이 각자 100원씩 거둬 저소득층을 위한 정선 신용협동조합을 세웠는데, 당시 300원이 지금은 자산 300억 원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정선 주민 대부분이 회원에 가입했다고 들었어요.” 4년 전 고희의 즐거움도 컸단다. 삼양동주민연대가 선교회에서 조촐한 잔치 상을 마련했고 한복에 꽃다발까지 안겼다고 한다.

철거민들과의 애환 때문인지 도시행정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공원이나 건물 짓는데는 무척 신경 쓰고 세금을 축내지만 서민들에게는 거의 혜택이 없습니다. 좋아지긴 하지만 박원순 시장이 더 시민우선 정책을 냈으면 합니다. 소외된 이들을 위해 애쓰는 복지단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들의 노고를 헤아려야 합니다.” 안 신부는 2년 전 서울시로부터 상도 받고 명예시민권도 받았다.

이 모든 게 평소 덕을 베푼 결과라고 하자 쑥스럽단다. 실제로 그에게 운도 크게 따른다.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는 공항영접 기회를 부여받았다. “평생 얻기 힘든 영광이지요. 교황님이 악수를 청하실 때 가슴 벅찼습니다. 통역하는 분이 저를 선교사로 소개할 때 제가 살짝 빈민사목이라고 했더니 교황께서 온화한 미소로 수고가 많다고 하시더군요.” 평소 “사제에게서는 양 냄새가 나야 한다”는 지론을 펴는 교황 역시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빈민사목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었다.


-내년 서품 50주년 맞춰 고향 노모랑 여행-

안 신부의 고향 사정이 궁금했다. “94세 홀어머니가 고향 오클랜드 요양원에서 휠체어에 의존해 사세요. 치매증세도 약간 있는데…” 북받친 그리움에 목이 잠긴 안 신부, 지난해 고향가서 찾아 뵙긴 했지만 아쉬움이 커 내년 사제 서품 50주년을 맞아 노모를 찾아가는 특별한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늘 그늘진 곳을 마다않은 안 신부, 세월호 참사로 비롯되는 우리 사회 안전사고에 대해 각성을 주문한다. “결국은 개인주의와 이기심, 그리고 무책임이 늘 문제지요. 지도층부터 각성해야 합니다. 신뢰가 허물어진 이유를 잘 헤아려야 하는 데 이걸 도대체 몰라요. 진짜 민주주의라면 주민을 위해 나서야 하는데 선거 때만 신경 써요. 가진 자들은 지금 가진 것을 선물이라 여기고 나에게 필요한 만큼만 가지되 남은 것은 나보다 못한 이들에게 나눠줄 의무가 있는데 이를 잊고 있어요.”

안 신부는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는 사회현상을 나무란다. “미국도 예외가 아닙니다만 양극화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부자들의 천국이 돼선 곤란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지는 것은 큰일입니다. 부자나 힘 있는 이들이 법을 무시하고 세금을 내지 않는 사회는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이 다가오고 성탄절이 가까워진다. 시간이 갈수록 기온이 떨어진다. 가난한 이들이 점점 더 힘든 시간이다. 이들에게 만추의 낭만과 호빵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어떻게 연말을 보내야 할지 미리 물었다. “성탄절은 모두가 기뻐하는 날입니다. 이날처럼 나머지 364일도 어려운 사람, 나만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관대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고 실천하길 기도합니다.”

황해창 선임기자/hchwang@heraldcorp.com


안광훈 로벨도 신부는 누구?

안광훈 로벨도 신부(73세)는 1941년 12월 14일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3남2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로버트 존 브레넌(Robert John Brennan). 체신부 공무원으로 전기 기술자였던 아버지만 빼고 가족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어린 시절 한국과 필리핀 선교 얘기를 담은 골롬반 회지를 보고 18세부터 골롬반에 입회해 사제의 꿈을 키웠다. 골롬반은 1933년 아일랜드 선교사 10명이 포교활동을 시작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65년 호주 시드시의 골롬반신학대학을 졸업한 안 신부는 그해 사제 서품을 받아 이듬해 한국에 파송됐다. 곧바로 서울 돈암동에 있는 골롬반 한국지부에서 1년 남짓 적응기를 보낸 뒤 1968년 삼척 성당 주임신부로 옮겼고, 1년 뒤에 정선성당으로 가 10년 이상 주임신부로 일했다. 1980년대 초중반, 서울 목동성당 주임신부를 맡아 안양천변의 철거민들과 애환을 함께했다. 1985년부터 5년 동안 서울의 골롬반신학원 원장을 지낸 안 신부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 시카고신학대학에서 1년간 성서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귀국 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빈민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삼양동 지역을 추천받아 1992년부터 5년 동안 삼양동 선교본당 주임신부로 봉직했다. 안 신부는 IMF외환위기 여파가 심각했던 1999년에 설립을 주도했던 삼양주민연대 대표를 2006년부터 맡아오고 있다.
그의 일상은 가난 그 자체다. 몸소 체험함으로써 불우한 이들의 편에 서길 그토록 갈망한다.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 20여 년 째 스스로 끼니도 세탁도 청소도 해결한다. 늘 버스나 전철을 이용한다. 자가용도 휴대폰도 갖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에게 최근 휴대폰이 생겼다. 미아지역 세입자회 측이 답답한 나머지 강제로 떠안기다시피 한 것. 안 신부는 사제복 대신 수더분한 평상복을 입는다. 상대방이 마음 편하게 다가오도록 하려는 배려 차원이다. 그가 ‘빈자의 등불’인 이유를 넉넉히 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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