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한편으로 여성 격투기 선수들이 스타가 된 사연이나 비결도 가지가지다. 그에 따라 국내 여성 파이터의 유형을 몇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인위적이긴 하지만 실력형, 미모형, 다재다능형으로 나눠 국내 스타 여성 파이터들을 소개해 본다.
사진: 함서희(가운데)가 라운드걸과 가수 박상민 씨와 함께 승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함서희는 마침내 UFC에 입성하면서 자신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사진제공=로드FC |
▶함서희, 유아독존의 실력형 파이터=함서희 이전에 아무도 없다. 척박한 한국 여자 격투기가 낳은 역대 최강의 파이터다. 그가 격투기에 입문하게 된 배경은 이미 제법 알려진 편이다. 여군에 입대하려던 함서희는 여고 2학년이던 2004년 체력을 기르기 위해 우연히 서울 은평구 투혼정심관을 찾았다. 그와 찰떡궁합이었다. 같은 해 킥복싱 신인왕전에서 준우승하는 등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함서희는 1년여 만에 국내 최강이 된다. 선수자원이 열악한 탓에 본래 체급이 아닌 몇 체급 위의 선수들과도 매치업이 추진됐지만 상대편은 하나같이 한사코 거절했다. 함서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상대 선수와 코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함서희가 국내 최강의 입식격투기 선수이면서도 입식 전적이 많지 않고 변변한 타이틀 하나 없는 이유다.
함서희는 2007년엔 일본 대회 딥(DEEP)을 통해 종합격투기에 데뷔한다. 당시 라이트급 챔피언이던 와타나베 히사에를 판정으로 꺾으면서서 일본 무대에 충격파를 던진다. 지난 해 5월엔 여자 부문인 딥 주얼스(DEEP JEWELS) 챔피언에 올랐다. 사실상 이 때부터 아시아 넘버원으로 평가됐다.
이 정도의 실적을 남겼는데도 함서희는 다른 여성 파이터들처럼 화제의 검색어에 오른다거나 방송 출연 요청이 쇄도하는 등 스타덤에 오르지 못 했다. 당시 여자 격투기는 일반인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 본위의 여성 선수를 관심 갖고 지켜볼 팬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실력과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발 여성 격투기의 인기와 국내 송가연 등 미녀 파이터들의 등장, 국내대회 로드FC의 여성부 경기 마련으로 국내 여성 격투기에도 조명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런 참에 그의 UFC 진출이 확정되면서 마침내 화제의 중심에 섰다. 함서희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사진: 송가연의 데뷔전 경기 장면. 화끈한 압승이었지만, 실력을 보여줬다고 하기엔 아직 전적이 일천하다. 앞으로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다. 사진=헤럴드스포츠 윤여길 기자/gilpoto@gmail.com |
▶송가연, 미모뿐만 아닌 다재다능형=국내에서 함서희보다 유명한 여성 파이터는 딱 한명 있다. 국내에선 ‘미녀 파이터’ 해외에선 ‘데들리 뷰티(deadly beauty)’로 불리는 송가연(20ㆍ팀원)이다. 운동선수답지 않은 그 깜찍한 마스크는 준연예인급이라는 평가다. 당돌하기까지한 거침없는 언변도 신세대들의 감성과 통하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그의 데뷔전은 해외 격투기 관련 매체들뿐 아니라 메이저 언론사에서도 관심있게 보도했다. 그가 뛰는 국내 대회 단체 로드FC의 홍보력 덕이기도 하지만, 그의 상품성이 해외에서도 통한다는 방증이다. 이제 막 1전을 치른 풋내기에 불과한데도 매스컴으로부터 엄청난 조명을 받는 상황. 분명히 이전에는 없었다. 최근엔 그런 관심도가 변질돼 한 안티팬이 도를 넘은 인신공격성 SNS 메시지를 작성해 송가연 측에 고소당하고 반성문을 제출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송가연은 일부에서 제기된 비판을 정면돌파하고 실력으로 안티팬들의 지적을 잠재울 작정이다. 실제 그의 체형을 보면 데뷔전 이전에 라운드걸로 모습을 비쳤을 때와 전혀 다르다. 훈련량이 얼마나 되는지 하체가 엄청나게 굵어졌다. 미모 관리만 생각했으면 그렇게까지 훈련을 할 리가 없다.
송가연은 방송출연 등 연예활동도 당분간 격투기 선수생활과 함께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연예계에서 계속 그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 한 굳이 이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이런 면들을 종합할 때 송가연은 미모형이기도 하지만 연예활동에도 재주가 있는 다재다능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말리기보다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함서희조차도 못 끌어온 대중적 관심과 언론 조명을 단숨에 끌어모았다. 그 결과 송가연 본인뿐 아니라 대선배인 함서희도 과거보다 많은 인기와 관심을 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대회와 여자 격투기에 도움이 되고자 연예활동을 한다’는 송가연 측의 말대로 송효경, 김지연 등 다른 여성 파이터들도 그 덕을 볼 수 있는 개연성이 생겼다.
사진: 복싱 챔프 출신 후진 라이카에게 펀치를 적중하는 임수정(왼쪽). 어느덧 은퇴를 고민하는 시기를 맞았다. 사진=헤럴드스포츠 윤여길 기자/gilpoto@gmail.com |
▶임수정, 원조 미녀파이터의 쓰라린 경험=송가연보다 먼저 알려졌던 원조 미녀파이터가 있었다. ‘파이팅 뷰티’ 임수정(29ㆍ삼산이글)이다. 한참 K-1 붐이 일던 2004년 입식격투기에 투신해 30전 가량의 전적을 쌓은 11년차 베테랑인 그는 사실상 은퇴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다. 이미 단맛, 쓴맛을 다 경험해 봤다. 이룰 것은 다 이뤘다는 생각이다.
2007년부터 종합격투기 대회 ‘네오파이트’의 입식격투기 스페셜 매치에 연속 출전했고, ‘더 칸’에서도 활약했다. 지난 2009년 국내에서 열린 K-1 대회(K-1 코리아 MAX)에서는 사상 처음 마련된 여성부 경기에서 일본의 강자 레나를 상대로 연장 접전 끝에 2-1 스플릿판정으로 승리했다. 올 9월 열린 종합격투기대회 레볼루션 2에서 종합격투기 데뷔전을 치러 승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좋았던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임수정에게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일본 예능프로그램에서 남자 코미디언들과 3대1의 대결을 벌였던 일이다. 격투기 경험이 있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를 번갈아 상대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을 넘지 못하고 완패했고, 가볍지 않은 부상도 입었다.
본인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다 잊은 일”이라며 쿨하게 넘겼다. 그런데 매스컴에서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일본 방송에서 그녀를 속여 처참히 패배시켰다며 임수정을 ‘가련한 피해자’로 낙인찍었다. 한국 코미디언 모 씨는 이를 거론하며 대리복수를 하겠다고 들먹일 정도였다.
그와 관련한 수십, 수백건의 기사와 방송이 나가며 ‘파이터 임수정’이 아닌 ‘불쌍한 임수정’이 됐다. 자존심 강한 임수정은 이것을 견디지 못 해 은퇴 결심을 더 빨리 굳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모 덕에 언론 조명을 받으며 스타가 됐지만,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이야기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런 상황은 진절머리를 칠 만큼 질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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