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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스타일만 고집하는 건 위선”…추상화 거장 윤명로, 혁신을 말하다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우리 시대 거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재해석돼야 할 동시대의 현역일까, 아니면 최신 미술 사조와는 동떨어진 ‘뒷방 영감님’일까.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일그러진 형상과 질감을 통해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한 사조)에서 1970년대 단색화로 이어진 한국 추상미술의 변천사 속에서 늘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윤명로(78) 화백이다.

한쪽에서는 미국의 미니멀리즘, 일본의 모노크롬과는 다른 독자적인 화풍으로서 한국의 ‘단색화(Dansaekwha)’가 급부상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한참 철 지난 벽지같은 그림으로 치부되는 등 극과 극의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단색화, 그 한 가운데 윤 화백도 있다.

현대 추상회화의 거장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화가인 윤 화백의 개인전이 ‘정신의 흔적(Traces of the Spirit)’이라는 타이틀로 15일부터 11월 23일까지 삼청로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가졌던 동명의 회고전과는 다른 신작들을 선보인다.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아직 할 것이 너무 많다”며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노장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전시다.

전시 오픈을 앞둔 지난 9일 저녁, 갤러리에서 만난 윤 화백은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해 온 지난 50여년의 화업을 반추하며 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한국 추상화의 거장인 윤명로 화백이 서울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정신의 흔적(Traces of the Spirit)’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갖는다. [사진=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한 스타일만 고집하는 건 위선”=“그 유명한 데미안 허스트도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작가들은 하나의 스타일이 생기면 여기에 평생을 매달려요. 마치 선승이 앉아 수도하듯이 말이죠. 일종의 무아의 경지에 도전한다는 점에서는 대단한 장점이지만, 시대가 이렇게 빨리 변해가는데 어찌보면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단색화라는 타이틀로 원로들과 함께 전시를 한 그이지만 “빠져나오고 싶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철 지난 그룹’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어느 형식에 매여서 스스로를 구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비슷비슷한 단색 추상화, 혹은 휙휙 휘갈긴 낙서처럼 보이는 그의 그림들은 사실 강산이 한번 변할 때마다 질료와 주제의식을 끊임없이 달리해왔다.

“회화에서 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큽니다. 재료의 변천이 이즘(-ism)의 변천을 이끌죠.”

1959년 제 8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재학생 신분으로 특선을 했던 ‘벽’이라는 작품이 그 시작이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동명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으로, 절망과 부조리의 극한 상황을 담은 당시의 화폭은 매우 구상적이었다. 그는 형태가 있는 작품을 그린 것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회고했다. 

정신의 흔적, acrylic iridescence on linen, 259x388㎝, 2014 [사진제공=아라리오갤러리]

▶“재료의 변천이 이즘을 바꾸다”=전후 실존주의가 ‘바이러스’처럼 퍼져 있던 1960년대초 윤 화백은 ‘1960년 미술가협회’를 만들고 ‘반(反)국전’ 운동을 표방하며 덕수궁 돌담길에서 야외전을 펼쳤다. 한국 화단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파리비엔날레 등 국제전에 참여하면서 화단의 새 바람을 이끌었다. 일명 ‘원형의 시기’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1970년대를 ‘룰러(Rulerㆍ자 혹은 통치자)의 시대’로 명명했다. 유신 공포의 시절 인간과 인간의 약속인 ‘자(규범)’는 사라지고 온갖 비리와 권력이 남용되는 극한 상황의 현실을 ‘균열(Crack)’시리즈에 담았다. 도료가 마르는 속도의 현상을 이용해 화폭에 강렬한 균열을 새기는 작업이었다.

이후 80년대 들어와서는 무작위로 화폭 위에 선을 그어대며 그 흔적들에 ‘얼레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얼레짓은 연실을 감고 푸는 기구인 ‘얼레’에서 따온 이름이다.

“미니멀리즘, 팝아트와 같은 외래 사조가 열병처럼 번지던 시기, 학생들은 이러한 현상을 모방하기에 급급했죠. 그래서 내가 먼저 변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이후 1990년대에는 가로 10m가 넘는 대형 화폭에 ‘익명의 땅’ 시리즈를 풀어냈고, 2000년대에는 아크릴에 쇳가루를 주 소재로 ‘겸재예찬’ 시리즈로 변화해갔다.

▶“전통은 무덤이 아니다”=“포스트포더니즘이 유행했던 시기엔 우리의 전통이 무덤처럼 여겨지기도 했죠. 하지만 보세요.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박물관부터 구경을 합니다.”

그는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를 두고 조선시대 관념산수 세계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체시킨 작품으로 극찬했다. 서양으로부터의 변화와 혁신을 수용하면서도 동양적인 정신세계를 꾸준히 담아 온 그가 겸재예찬 연작에 집중한 이유다. 2002년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은퇴한 그가 세계화라는 명분으로 우리의 것을 잃어가고 있는 젊은 세대를 위해 던진 화두이기도 했다.

2010년대에 들어 윤 화백은 ‘정신의 흔적’들에 천착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여전히 기개 넘치는 붓질에 색감은 더욱 몽환적으로 변화했다. 질료와 재료 역시 ‘혁신’을 꾀했다.

“모두가 최고급 재료를 좋다고 여기죠. 하지만 이번 작품들은 닳아빠진 몽당 빗자루로 그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비천한 재료죠. 수없이 붓질을 해왔지만 한계가 있었어요. 그런데 몽당 빗자루를 쓴 덕분에 또 다시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됐습니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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