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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구라’로 풀어낸 한국근현대사의 희비극, ‘풍의 역사’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좋은 말로 ‘허풍’이고, 속된 말로 ‘구라’다. 37세의 젊은 소설가 최민석이 최근 출간한 새 장편 ‘풍(風)의 역사’(민음사)는 뻔뻔스러운 ‘구라’로 풀어낸 한국근현대사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한국전쟁, 새마을운동, 유신, 박정희 대통령 서거, 군부독재, 시위 대학생의 죽음까지 70여년에 이르는 한국근현대사의 희비극을 천연덕스럽고 걸쭉한 풍자와 해학으로 뀄다. 찧고 까불고 어르고 달래고 눙치는 입담으로 비장한 한국사의 여러 계기들을 우스꽝스럽게 희롱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드러나는 반골의 안목, 즉 승자와 강자의 역사를 비판하고, 패자와 약자를 연민하는 정신이 만만치 않으니 골계미(骨稽美)가 비범하고, ‘말 중의 뼈’가 옹골차다 하겠다.

비견한다면 형식은 할리우드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단연 떠오르게 한다. ‘이 풍’이라는 인물이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화자는 ‘이 풍’의 손자 ‘이 언’이 전하는 할아버지의 ‘무용담’이고 ‘구라’다. 그 이야기란 하도 기가 차서 ‘믿거나 말거나’ 식인데다 피내림한 것이라, ‘이 풍’의 별명은 ‘허풍’이었고, 그 아들이자 화자의 아버지인 ‘이 구’의 그것은 ‘허구’였다. 짐작한대로 화자의 별명은 ‘허언’이다. 


화자의 할아버지 ‘이 풍’은 1930년 8월 15일생인데, 그는 요샛말로 하면 대단한 ‘허세’로, 자신의 출생을 이렇게 허황되이 이르곤 했다.

“내가 태어나던 해인 1930년에는 말이야, 불세출의 영웅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여기저기서 태어났어. 일단 프랑스의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가 7월 15일에 태어났지. 그리고 그보다 달포하고 보름 앞서 미국에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태어났어. 나는 8월 15일에 태어났는데, 생각해 보니 내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그날에 광복한 것 같아. 나보다 사흘 늦게 태어난 동생이 있는데, 시를 잘 썼지. 이름이 신동엽이라고. 아, 저 멀리 태평양과 대서양을 넘어 스코틀랜드에서도 잘생긴 동생이 태어났지. 숀 코너리라고……“


그리하여 서쪽 바다의 한가운데 섬 ‘중도’에서 세상을 맞은 이풍은 어린 시절부터 비범하기 이를 데 없어 소녀부터 아가씨,아줌마, 할머니까지 울고 갈 ‘미소년’이었으며, 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어른 몸집으로 커 동네 어르신들과 농짓거리를 할 정도였다. 그는 열 세살에 짝사랑하던 아리따운 한 살 위 처자 ‘밤’이 밤길에 일본 순사의 앞잡이로부터 희롱을 당하자, 그 일당 수십명을 때려눕혔다. 이로 인해 일본 순사를 믿고 동네에서 패악질을 일삼던 앞잡이 패거리들에게 미움을 사 그길로 일본군으로 징병돼 전선에 나간다. 2차 대전 말기, 전장의 이풍은 연합군에 패퇴해 달아나던 일본군 속에서 ‘밤’의 이름을 외치며 질주하던 모습이 미군의 눈에 띄고, “조선의 병사마저 평화를 위한 폭탄(밤, bomb)을 원한다”는 메시지로 백악관까지 보고돼, 원자탄 투하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일본의 패전으로 마을에 돌아온 풍은 밤과 혼인하고 아들 ‘구’까지 낳아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듯 싶었지만 한국 전쟁이 터지고, 피난 중 아내와 자식을 위해 먹을 거리를 구하기 위해 나섰던 풍은 엉겁결에 국군으로 징집돼 다시 전장에 나선다. 그 와중에 풍은 다시 미군, 그 중에서도 맥아더 사령관의 눈에 띄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 승리를 이끌게 된다. 이후에도 이풍의 인생유전은 거제도포로수용소를 거쳐 베트남 전쟁, 10ㆍ26 대통령 시해사건의 현장, 80년대 남산의 고문실로 이어진다. 아들 이구의 삶도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테레비’에 나오고 ‘라이방’(선글래스)을 끼고, 돈을 벌고 싶어 베트남 전쟁에 나갔다가 아버지와 함께 베트남 지하 범죄조직의 음모에 연루되기도 하고,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고 싶어 뒤늦게 진학한 대학에서는 대학생고문치사사건을 접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풍의 손자이자 작품 속 화자인 이언이 90년대 중반 할아버지의 임종을 맞고, 같은 대학생이 시위 중 전경에 맞아 죽는 사건을 접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풍의 반대편에는 마을에서 일본 순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인물이 있다. 그저 ‘앞잡이’라고 지칭되는 이 존재는 해방 후에는 미군에 붙었다가, 거제포로수용소에선 ‘친공포로’였다가, 베트남에선 암흑가의 두목이 됐다가, 80년대에는 고문기술자로 활동하며 이 풍의 일생 고비고비마다 적으로서 맞부딪친다.

‘풍의 역사’는 바람에 흔들리듯 권력과 권력의 싸움 속에서 떠밀리어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무명 부초의 인생을,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다니며 지냈던” 능동적이며 영웅적인 삶으로 의도적으로 ‘왜곡’한다. 망상적이라고 할 허풍과 허세로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란, 강자와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약자와 패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 곧 공식적인 기록은 권력자의 것이지만, ‘문학’ 즉 ‘이야기’란 민초들의 것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내는 과장과 허풍에 뒤따르는 소소한 익살도 많다. 이 풍은전쟁통에서 ‘라이언 일병’을 만나기도 하고 훗날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인물(신중현)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그는 젊은 날의 고초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자위하고, 베트남 암흑가에서 ‘만옥’이라는 중국 여가수를 구출하며, ‘여기 길 떠나는 저기 방황하는 사람아’로 시작되는 노래 가사를 훗날의 ‘가왕’에게 준다. 아들 이구는 밴드멤버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다가 즉흥적으로 지어낸 노랫말 때문에 규정 위반으로 실격 되는데, 그 때의 가사는 “난 알았어!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널 떠나버려야 한다는 걸”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역사에 대한 엄숙주의를 벗어나 판소리의 풍자와 해학을 걸죽한 입담으로 구현하고, 대중문화의 표상들을 능란하게 요리한 ‘풍의 역사’는, 걸출한 이야기꾼인 성석제의 뒤를 이을만한 젊은 작가의 재능을 여지없이 보여준 작품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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