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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 방한] “예술에 담긴 할머니들의 상처…교황께서 보듬어 주시길”
위안부 피해 할머니‘ 미술치료’…김선현 차의과학대 교수
“토끼와 거북이 그린 어느 할머니
“날 끌고간 일본군과 같네” 토로
“평생동안 맺힌 한 창작으로 승화
“외상후스트레스 치유 등 큰 도움
‘안네의 일기’ 처럼 역사로 남겨야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일본 군인이 돼서 나와 우리 가족의 맺힌 한을 풀어 줄 거야. 일본놈들을 다 ○○○○거야.”

지난 2012년 6월 세상을 떠난 고(故) 김화선 할머니는 ‘미술치료’를 받으며 일본군 위안부로서 살았던 깊은 한을 이같이 토해냈다. 김 할머니가 그린 ‘원수를 갚을 준비가 돼 있는 나’라는 그림 속 인물은 일본군복을 입고 입술을 앙다문 모습이다. 하지만 그림 속 인물이 어떤 공격적 행동을 취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차라리 깊은 슬픔에 잠겨 보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눈을 가린 모습에서 실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허무함을 읽을 수 있다.

지난 2005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7명을 대상으로 ‘미술치료’를 해온 김선현(46·사진) 차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 교수(원장)은 “그림은 말이나 글로 전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이야기를 끌어내는 매개체로 그림만한 게 없다”고 설명한다. 교황 방문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 해결과 극복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헤럴드경제는 김 교수를 만났다.

그에 따르면, 치료진이 ‘좋아하는 동화를 그려보시라’ 권하면 어느 할머니는 ‘토끼와 거북이’를 그렸다. 그림을 그리다가다도 문득 “거북이가 토끼를 속여서 데려갔지? 일본군이 취업시켜준다며 나를 끌고 간 거랑 똑같네”라며 옛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고 한다.

일본군 성노예로 살아야 했던 잔인한 세월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할머니들은 말 못할 상처를 안고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할머니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데 그림은 훌륭한 열쇠가 됐다. 

할머니들은 때론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붓질을 했다. 또 때론 고향 생각에 잠겨 붓을 잡은 손이 떨리기도 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한참을 울기도 하고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웃기도 했다.

“로샤 검사를 봐도 할머니들은 성적으로 왜곡된 인지가 많아요.”

로샤 검사는 아무런 의미없는 그림에서 어떤 부분을 주목해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보는 검사로, 이때 보이는 반응들이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할머니들은 그림에서 자궁, 짓밟힌 몸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굴곡진 인생이 남긴 마음의 상처다.

김 교수는 “위안부 생활을 그린 그림에는 총, 칼이 등장하고, 어둡고 칙칙한 색이 많다”고 설명했다. 고통은 해방 후로도 이어졌다. 여전히 분노와 경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위안부에 끌려가기 전을 묘사한 그림에서는 머리를 길게 땋거나 치마저고리를 입었다든가 여성성의 긍정이 보입니다. 하지만 해방 후 생활을 그린 그림에서는 머리가 짧거나 바지를 입었다든가, 여성성을 거부한 그림이 많아요.”

처음엔 방어적이기만 했던 할머니도 미술치료를 통해 여성으로서 자존감을 되찾고 상처를 달랬다. 김 교수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외상 경험에 재노출되고 감정표현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창작 과정 속에 치유능력이 내재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으로 김화선 할머니가 그린 ‘결혼’이란 그림을 꼽았다. 그림 속 김 할머니는 순백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다. 꽃장식과 붉은 입술에서 여성성이 한껏 강조돼 있다. 신랑 역시 와인빛 정장을 빼입은 모습이 근사하다. 바탕은 온통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채워졌다. “할머니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나도 결혼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미술치료는 2012년을 마지막으로 끊긴 상태다. 김 교수은 “할머니들께서 워낙 고령이라 건강에 문제가 많다”며 우려했다. 일부는 치매 증상을 보이며 기억력에 문제를 겪고 육체적으로도 쇠약해져 그림을 그리기도 힘든 상황이 왔다.

한편 할머니들의 그림 100점은 국가기록물 등록을 위해 접수를 마친 상태다. 여성가족부는 이 그림들을 유네스코 기록유산에도 등재할 계획이다. 김 교수는 “할머니들의 기록이 ‘안네의 일기’와 같은 역사의 기록물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전시 상황에서 여성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폭력이 가해졌는지 알리고 할머니들의 삶에 정당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톤을 높였다.

“교황 방문을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리고 국제적 연대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김기훈ㆍ박혜림 기자/kihun@heraldcorp.com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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