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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을 뒤집은 희대의 섹스스캔들, 세종과 성종, 정조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조선시대 남녀의 정욕을 관리하는 일은 치국의 가장 큰 중요한 요건 중의 하나였다. 조선의 건국이념을 담아 정도전이 1394년(태조 3) 펴내고 후일 조선의 종합법전 ‘경국대전’의 틀을 만든 ‘조선경국전’은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며 “남녀 간의 구별이 없다면 인도가 문란해져 왕화가 민멸될 것이니 그러고도 어떻게 국가를 다스리겠는가”라면서 “옛날 성왕들은 예를 만들어서 그들의 정욕을 절제했고 형을 제정해서 그들의 음탕한 행동을 억제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 전기에 두 건의 커다란 성 스캔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먼저 세종조 평강현감의 정실 부인이었던 유감동이라는 여인이 당대 고위 관료들과 귀금속 장인을 포함한 뭇 남자들과 간통 행각을 벌여 조정의 갑론을박을 낳았다. 유감동이 관계한 남자들은 밝혀진 것만 십수명이 넘었고, 세종에게 이른 보고는 “몰래 간통한 사람까지 더하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전할 정도였다. 그 중에는 유감동의 남편과 매부지간인 이도 있었고, 숙부-조카의 관계에 있었던 이들까지 나왔으며, 당시 좌의정 황희의 아들이나 개국 공신의 자제들도 적잖이 포함됐다. 규모로 보나 반륜의 정도로 보나, 연루된 자들의 지위로보나 그야말로 희대의 섹스스캔들이었다. 사건이 터지자 신하들은 유감동과 그 일족에 대해 극형까지 거론하며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으나 세종은 그럴 것까지 없다면서 한층 너그러운 처분을 고집해 군신간 논쟁이 벌어졌다. 유감동은 사건 후 기록에서 사라졌으나 그의 상대로 지목된 간부들은 대부분 멀쩡하게 지위를 보존했을 뿐 아니라 논란이 수그러들자 몇 년간 더욱 승승장구한 경우마저 있었다. 


또 다른 사건은 성종 때 일어났다. 80년대 에로 영화로도 잘 알려진 ‘어을우동’ 사건이다. 어을우동의 성씨는 박으로, 원래 효령대군(세종의 둘째형)의 서손자인 이동의 부인, 즉 왕 종친의 며느리였다. 그러나 박어을우동은 첩에 빠진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몇 년 뒤 간통 사건에 걸려들게 된다. 어을우동의 간통 상대 역시 화려했다. 위로는 왕의 종친들부터 아래로는 은을 다루는 장인과 사노비까지 10명에 이르렀다. 역시 이번에도 군신 사이에 처벌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양상은 유감동 사건때와는 정반대였다. 법에는 간통한 여인이 받을 수 있는 형의 종류는 매(장형)와 유배 뿐이었으나 성종은 본보기로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정의 일부 신하들은 ‘법대로’를 요구했다. 결국 성종의 의중대로 어을우동은 사형됐으나 간통의 상대였던 이들은 잠시 소동 끝에 대부분 제 자리로 돌아갔다. 처벌의 수위를 다르게 한 세종과 성종의 개인적 성향도 흥미를 끌지만 두 사건에서 더 핵심적인 것은 배우자에 대한 순결과 성실의 의무로서 남녀 모두에게 부여됐던 ‘정절’의 의무가 실상은 여성에게만 절대적으로 강요됐던 덕목이었다는 사실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박사가 최근 출간한 ‘정절의 역사-조선 지식인의 성 담론’(푸른역사)의 내용 일부다. 이 책은 ‘정절’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 성 윤리를 법과 제도로부터 열녀ㆍ절부 등 모범 사례를 발굴하고 칭송한 국가 정책, 교육과 교재ㆍ서책ㆍ문헌ㆍ이론을 통해 형성된 담론, 실제 일어난 정절 위반의 사건과 논쟁을 통해 고찰했다. 이에 따르면 조선을 지배했던 사대부 남성들은 남편이 버리거나 죽었거나 개가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결로서 사별한 남편을 뒤따르는 등의 ‘정절녀’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칭송하며 교조화ㆍ신화화시켰다. 정절 여성을 포장하는 한편으로는 실행(失行)이나 자녀(恣女)로 부르는 여성들의 ‘음란’ 행위를 규정하고 검열하며 감시하는 시스템을 발전시키며 여성들을 ‘순결’과 ‘오염’의 이분법의 테두리로 가두어놓았다.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제도를 재생산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이러한 담론은 ‘경국대전’으로 상징되는 법과 제도의 한 축이 됐으며, ‘삼강행실도’로 대표되는 교육ㆍ교훈서의 근간이 됐다. 그리고 결국 정절은 여성의 몸과 욕망을 통제하는 의미체계이자 ‘국법’이 됐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정절’이라는 무대에서 행해진 ‘그로테스크한 잔치’였다. 1787년(정조 11)에는 최옥만이라는 사람이 아내 김송악의 간통을 목격하고 현장에서 칼로 찔러 그날로 죽게 했는데, 이에 대해 정조가 “최옥만이 못난 사내라서 입으로만 우물거리고 마음이 여려서 일찍이 한번도 노여움을 풀지 못하다가, 그 일이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약간이나마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이와 같이 사람을 죽이기에 이른 것”이라며 거의 박수쳐 격려하는 분위기로 무죄석방한 것에 이르면 그 기괴함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남편이 이렇듯 거리낌없이 부정한 아내를 응징할 수 있는 ‘간통 현장’은 “외간 남자를 두고 치마를 당기거나 마주 앉아 밥을 먹는 행위”까지 포함될 정도였다. 또 조선의 남성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한결같이 ‘소유물’로 여겼는데, 호란과 왜란 등 잇따른 외적의 침입 때는 자신이 먼저 도망가거나 아내와 딸이 끌려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외적에 끌려갔다가 죽은 여성들은 ‘정절녀’로 칭송하는 한편, 적국에서 간신히 버텨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여인은 박대했다. 왜란이나 호란 후 ‘환향한 부인’을 두고 많은 사대부 남성들이 이혼을 요구한 것은 당시 커다란 사회문제 중 하나였다. 


저자는 “조선에서 여성의 정절은 제도와 관념, 문화와 습속 등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발화되었다”며 “정절을 권장하고 정절을 강제하는 다양한 장치들이 여성의 삶과 생각을 주도하였고,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절 여성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는 정치권력을 가진 남성들, 지식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머리와 입과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결국 저자가 말하듯 정절의 역사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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