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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책> 고전소설에서 찾은 조선여성활약사…우리에게도 인어공주와 팜파탈과 여전사가 있었네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이화여대 조혜란 교수(국어국문학)의 ‘옛 여인에 빠지다-춘향에서 향랑까지’(마음산책)는 옛 소설과 이야기를 통해 본 여성들의 욕망과 환상의 연대기다. ‘구운몽’에서 ‘만복사저포기’ ‘삼한습유’ ‘홍계월전’ ‘춘향전’ ‘사씨남정기’ ‘변강쇠전’ 등 13편의 조선조 소설 속 여성 캐릭터 15명의 활약상이 그려졌다. 저자는 ‘구운몽’에서 주인공인 양소유의 여덟 여인 중 하나인 백능파를 조선판 인어공주로 해석한다. 백능파는 원래 용왕의 딸로 권력이 한층 강한 다른 지역의 용왕 자제와 결혼을 거부하고 도망쳤다가 양소유를 만나 운명임을 직감하고 그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돕는다. 몸에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백능파는 양소유와 하룻밤을 지내고 후일 사람이 돼 주인공의 첩이 된다. 백능파는 처음 아황과 여영이라는 중국 순임금의 뒤를 따라 죽은 정절녀들을 가장 먼저 입에 담을 정도였고, 첩으로서의 지위를 마땅히 받아들이는 등 유교이데올로기를 반영한 캐릭터이지만, 정해진 혼처를 거절하고 스스로 배우자를 결정했으며,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점에서 당대 여성의 전형으로부터 진일보한 캐릭터일 뿐더러 ‘인어공주’보다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처녀귀신은 조선 지배층 남성의 비겁과 무능으로 외적에 괴롭힘을 당하고도 박대받아야만 했던 여인들의 한풀이 같은 작품으로 저자는 읽는다. 이 소설은 의지가지 없이 홀로 외롭게 살던 남자 양생이 부처에게 염원한 끝에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게 되지만, 상대는 처녀귀신이었다는 이야기다. 여인은 전란 중 외적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몸. 그러나 처녀로 죽어 얼마나 사랑에 사무쳤으면 귀신이 돼 총각 앞에 나타났을까? 소설 중 처녀귀신은 “치마를 걷고 남자를 따라가는 행실이 음란하다는 것과 예의를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쑥덤불 우거진 곳에서 살다보니 예의를 잊었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한번 일어나자 끝내 이를 지킬 수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양생과 함께 수년간을 기다린 하루, 운우의 열락으로 가득한 밤을 보낸다. 그날이 지나고 양생은 천도제를 지내 처녀귀신의 넋을 위로하는데 이에 힘입은 때문인지 처녀귀신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여인이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다. 그리고 양생은 종적을 감춘다. 억울하게 죽었지만 귀신으로나마 한과 욕정을 풀고 그것도 모자라 남자로 다시 태어났지만, 상대인 남자는 염원하던 짝을 찾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말하자면 정절로 묶여있던 여성의 복수인 셈이다.

조선조 고전소설 에서 가장 독창적인 여성 캐릭터 중의 하나는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19세기 김소행의 한문소설 ‘삼한습유’의 ‘마모’다. 저자 조혜란 교수의 박사 논문 연구 주제이기도 했던 만큼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특징이 자세히 서술된‘삼한습유’의 ‘마모’는 여성이고 악역이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귀여움’과 ‘씩씩함’을 갖추고 있으며 남다른 용맹성과 진취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삼한습유’는 천상의 세계에서 신과 악귀가 대결하는 신마(神魔)소설인데, 오늘날의 용어로 이르자면 판타지소설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마모는 마군을 이끄는 마왕의 부인이다. 마왕과 마모가 하는 일이란 인간 세계에 선을 쫓고 악을 부르며, 인간들에게 온갖 악행을 하는 것으로, 그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남녀간의 혼사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극한 사랑으로 천상의 존재인 신녀(神女)와 신라의 한 젊은이가 혼인을 맺게 됐다. 이를 두고 마왕과 마모가 필생의 대업으로 혼인을 깨려한다. 이로 인해 천군과 마군간의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마군의 어머니라는 뜻의 마모는 나찰의 딸로, 이름이 보기 흉하게 생긴 악신을 뜻하는 ‘구반다’다. 구반다는 늙고 추한 외모의 소유자이지만, 소설 전편에 걸쳐 누구보다 화끈하고 용맹하며 대범하고 헌걸찬 모습으로 전쟁을 주도하다시피한다. 저자는 마모를 여성이 가진 생명력을 반영하고, 여성성을 긍정하는 인물로 해석하며, 오늘날‘아줌마의 힘’과 비견한다. 마모는 조선 시대가 낳은 선구적인 아줌마 캐릭터였던 것이다.

저자는 ‘변강쇠가’에서 옹녀를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워 뭇 남자를 전전하며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 생존할 수 밖에 없었던하층민 여인의 이야기라는 하나의 독해 방법을 제시한다. ‘춘향전’의 춘향은 정절이데올로기에 갇힌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랑의 승리자로 읽는다. 춘향의 행위는 ‘성적 자기결정권’과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자존감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억압됐던 여성 욕망의 대리실현의 압권은 ‘홍계월전’과 ‘옥루몽’의 여장군형 캐릭터다. ‘홍계월’은 부모가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남장해서 키워진 여식으로 후일 세상을 호령하는 장군이 되고, 여인임이 밝혀진 후에는 고위 관료와 혼인을 한다. 그러나 남편이 자신보다 출중한 아내를 질투하자, 전쟁으로서 승복시킨다는 내용이다. ‘옥루몽’의 여주인공격인 강남홍은 원래 재색이 뛰어난 중국 강남의 제일가는 기생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다른 남자가 자신을 탐하자 물에 빠져 자결을 시도하고, 간신히 구조된 뒤 여장군이 돼 비호를 때려잡고 쌍검으로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여장군이 된다. ‘옛 여인에 빠지다’는 우리 옛 이야기에 이처럼 많고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있었으며 이토록 매력적이고 강력하며 진보적인 일면을 갖추고 있었는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책이다. 책 속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절의 역사’에서 논한 조선 여성들의 삶과 그들을 둘러싼 남성들의 담론을 만나게 되는 것도 뜻밖의 수확이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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