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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트릭스 미국’…섹스시간도 계량화, ‘삭막한 숫자 세상’
[헤럴드경제=천예선 기자]22세기 말 인간이 컴퓨터에 의해 양육되는 세계를 그린 블록버스터 영화 ‘매트릭스(matrix)’.

20세기 말인 1999년 첫 시리즈가 개봉한 이래 ‘매트릭스 리로디드’, ‘매트릭스 레볼루션’ 등이 연달아 제작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매트릭스’로 불리는 영화 속 가상공간에서 두뇌의 기억을 조작해 인간을 지배하려는 컴퓨터와 이에 대항하는 인간의 대결을 그린 영화다.

이같은 영화 속 ‘매트릭스’가 현실세계를 잠식해가고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미국이 섹스 시간까지 계량화하는 ‘매트릭스 합중국’이 돼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사랑도 ‘숫자’가 되나요?=NYT는 “지난 수년간 우리 주위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며 “숫자가 넘쳐나고 데이터가 만연하다”고 진단했다.

앞서 온라인매거진 ‘너브닷컴(Nerv.com)’은 최근 미국 50개주 섹스 지속 시간을 집계해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동안 월간 혹은 신혼기간 섹스 횟수를 집계한 조사는 많았지만 미국 50개주를 대상으로 성관계 지속시간을 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너브닷컴 조사에 따르면, 미국 50개주 중 성관계 시간이 가장 긴 주는 뉴멕시코 주로 7분 1초로 나타났다. 2위는 웨스트버지니아(5:38), 3위는 아이다호(5:11)였다. 최하위는 알래스카가 1분 21초로 가장 짧았고, 사우스다코타(1:30), 버몬트(1:48) 순이었다. 미국 최대 도시 뉴욕이 위치한 뉴욕 주는 3분 1초로 집계됐다. 


NYT는 “역사, 수학, 종교, 문화 등 계량화가 힘든 분야는 일상 생활에서 멀어지고 기술, 통계, 과학과 수학이 판치는 세상이 됐다”면서 “의사소통의 가장 기본인 ‘대화’는 ‘숫자표’로 대체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아메리카 매트릭스 합중국’이 됐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신문은 심지어 인터넷 사용자들이 웹페이지에 머무는 시간 통계를 거론하면서 대놓고 독자를 겨냥하기도 했다. 신문은 “여기까지 읽고 당신은 더이상 기사를 보지 않을 지도 모른다”며 “1페이지당 머무는 시간은 15초”라고 직언했다.

▶숫자가 된 인생=실제로 현대인의 생활에서 숫자는 이미 언어를 대체했다. 건강,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는 물론 사회과학, 종교, 라이프스타일까지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미국인의 69%는 자신의 몸무게와 다이어트, 운동량을 지속적으로 기록한다. 또 30%는 혈압과 수면, 두통에 관한 정보까지 체크한다. 이에 힘입어 피트니스 관련 디지털 기계 시장은 지난해 3억3000만달러(약 3358억원)로 급성장했다. NYT는 한국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를 거론하면서 “최신 갤럭시는 심박수 모니터 기능을 추가했다”고 덧붙였다.

데이터 세상은 스마트폰에서 꽃피웠다. 수면 사이클을 알려주는 유료 앱은 주요 8개국에서 베스트셀러이고, ‘리포터’라는 앱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오늘 배운 내용을 하루 두번 복습시키는 등 인생을 그래프화 해준다.

또 세계 최대 SNS인 페이스북은 친구 수를 계산해주고(사용자당 평균 338명), 게시글 아래 ‘좋아요’ 수와 댓글 숫자를 알려준다.

숫자는 마을도 만든다. 미국 맨해튼 서부 재개발 지역에는 ‘수량화 커뮤니티’가 들어선다. 당국은 전자 모니터를 통해 통행량과 대기의 질, 전기ㆍ가스 소비량 보여주고, 오늘 버린 쓰레기에서 제대로 비료가 만들어지는지를 데이터화하는 ‘스마트 커뮤니티’를 건설할 계획이다.

▶숫자가 왜 문제?=이같은 계량화 사회가 주는 편리함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진정한 나 자신이 사라져간다는 데 있다.

미국의 금융통계 분석가이자 베스트셀러 ‘블락스완’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자신이 얻은 측정값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 결과,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례로 “고기를 몇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무게와 칼로리만의 숫자로 변질되면 고기를 먹는 기쁨과 당시 상대방과 나눈 대화의 줄거움 등 계량화 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은 사라져 버린다”고 꼬집었다.

논픽션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들’의 저자 앤 라모트는 “이런 쓰레기들(데이터)이 우리의 생생한 감각을 훔쳐간다”면서 “데이터와 공식대로 살아가면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획일화된 사회를 비판했다.

NYT는 20세기 천재 수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해 “숫자로 셀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소중한 것은 아니며, 소중한 모든 것이 숫자로 셀 수 있는 것도 아니다”며 ‘매트릭스 세상’의 위험성을 거듭 경고했다.


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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