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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잇 아이템’을 찾아라…180도 바뀐 유통 문턱
[헤럴드경제=한석희 기자]제품을 구매하러 갔다가 말 한 마디 못 꺼내보고 울먹이면서 문을 나서는 경험은 요즘 웬만한 유통업체 바이어들이면 하나 둘 갖고 있다.

바이어가 문전박대 당했다? 유통업 성격상 ‘비밀(?)의 만능열쇠’로 불리는 ‘바잉파워(구매력)’를 손에 쥐고 있는 바이어가 문전박대를 당하다니 얼핏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백화점과 대형마트 업계에서 절대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롯데백화점과 이마트의 일선 바이어를 통해 본 ‘잇 아이템(꼭 가져야할 상품)’ 전쟁은 바잉파워 이론마저 바꿔놓고 있다. 규모의 경제가 무너지고, 채널간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대형마트라고 해서, 혹은 백화점이라고 해서 ‘바잉파워’에만 의존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부 브랜드의 경우엔 오히려 대형 유통업체를 능가하는 ‘공급 파워’를 내세우는 상황까지 나오고 있다.

홈쇼핑 업계 한 관계자는 “잇 아이템은 사실 ‘단독 판매’에서 출발하지만 각 업태별로 규모의 경제가 무너지고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단독’은 하늘에 별따기와 같다”며 “업체들도 이제는 이런 사정을 잘 알아 일부 핫한 아이템이나 브랜드같은 경우는 오히려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해외출장...문전박대는 다반사

롯데백화점 상품본부 PB팀 이승주 CMD(선임상품기획자)는 1년에 8~9 번은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미국, 유럽 등 유통 선진국은 몇 번을 갔다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잇 아이템’ 전문 사냥꾼의 출장은 겉에서 보는 만큼 절대 화려하지 않다. 이 CMD는 “스트레스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라고 엄살(?)을 부린다.

이 CMD는 “보통 한 번 해외에 나가면 8일 가량 머무는데 이 기간 평균 30~40개의 브랜드와 미팅을 갖는다”며 “하루에 5개 업체와 미팅을 갖는다고 해도 2시간 마다 이 곳 저 곳을 뛰어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미팅도 단순한 시장조사가 아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몇 억을 몇 천 만원 단위로 쪼개 이 브랜드, 저 브랜드를 사들여야 한다. 재고까지 생각하면 미팅 한순간 한순간 허투루 지나갈 수 없다. 그야말로 ‘보따리상’이다.

이 CMD는 “규모의 경제가 무너지고 시장이 성숙될 수록 소비수준은 오히려 많이 올라가 고객들의 니즈도 다양화 되고 있다”며 “게다가 이 백화점, 저 백화점을 가나 모든 백화점이 이미지에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파는 것은 모두 똑같아 동질화 현상은 심해져 아이템을 차별화하지 않고는 소비자들의 눈길을 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출점이 제한되면서 백화점간 동질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데다 브랜드 동질화까지 겹쳐 국내 백화점이 그저 그런 백화점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1990년대 일본 1위 백화점이었던 소고백화점은 점포 수 늘리기에만 집중하다 경영악화로 2003년 세이부백화점에 합병되는 수모를 겪었다.

자체 개발 및 발굴한 상품으로 차별화에 나섰던 이세탄백화점 신주쿠점은 지난 2012년엔 매출 2조6000억원으로 세이부 본점마저 앞지르는 저력을 보였다. 아이템을 차별화 하지 않고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브랜드 중복률이 90%에 달할 정도로 시장의 동질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백화점 업계가 아이템 차별화를 위해 직매입을 늘리려고 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 CMD는 “올해 롯데백화점의 전략이 신(新) 컨텐츠 개발”이라며 “가격경쟁력을 승부하는 PB가 아니라 컨텐츠로 승부를 걸어야 승산이 있다”고 설명했다. 2~3년전만 해도 ‘가격 경쟁력’만 있으면 통했지만, 지금은 가격경쟁력은 필수요건이지 충분요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A부터 Z까지...‘만능’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얼마전 이마트는 시중 브랜드 전기렌지 보다 최대 50% 저렴한 이마트 자체브랜드 PL 러빙홈 전기렌지를 출시했다. 시중 브랜드와 빌트인 가전 시장이 절대적 우위를 지니고 있는 전기렌지 시장에 대형마트가 진출한 것 자체가 모험(?)이다.

이마트에서만 살 수 있는 이마트 전기렌지 출시를 위해 조용욱 이마트 가전담당 바이어는 숱한 거절과 설득을 반복해야 했다. OEM 업체 하나 선정하기 위해 전국 방방곳곳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조 바이어는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업체들이 갖고 온 아이템을 실렉트(선택)하기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며 “특히 전기렌지 같은 경우 만들어 준다는 데가 있어야 하는데 국내에 OEM 업체가 그리 많지 않은데다, 설령 있더라도 기존 가전 브랜드사의 눈치를 봐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말했다.


조 바이어가 전기렌지에 눈을 돌린 것은 가스렌지 메인 업체가 전기렌지 시장까지 독점하다시피하다 보니 전기렌지 가격이 턱 없이 비싸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시중 전기렌지 보다 값은 싸면서 저가 중국산의 품질문제까지 해결하면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템을 잡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최종적으로 제품을 출시하기까지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적합한 OEM 업체를 발굴해 PL 제품 출시를 최종 합의하는 데만도 2개월의 설득 시간을 가져야 했다. OEM 업체가 있는 화성에만 30~40여차례 왔다갔다를 반복한 끝에 설득에 성공했다.

조 바이어는 “기존 브랜드 업체들은 별도로 OEM 전담부서를 둬서 진행하지만 대형마트는 바이어가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진행해야 한다”며 “하다못해 박스를 주문하고, 문구를 만드는 것조차 바이어의 손에서 시작되고 끝난다”고 말했다.

게다가 회사 내부를 설득하는 것도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연간으로 전기렌지 매출이 고작 13~14억원 정도에 불과한데 한번에 40억원 이상을 발주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기 때문.

조 바이어는 “점포 확장에는 한계가 있고, 거기다 인터넷까지 활성화되면서 단순히 가격으로 승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거기다 대형마트라는 공간적인 제약에다 공정거래 이슈 등 사회적 현상까지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지금은 무엇보다 시장개발에 신경을 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잇 아이템’을 찾기 위한 전쟁은 바이어들간 경쟁 심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하다못해 자신이 발굴한 아이템의 성공을 위해 광고 하나 나가는것 조차 바이어들간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hanimom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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