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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보의 초점이 나가니…패션의 본질이 드러나다
사진작가 천경우의 이색 ‘구호’ 패션 화보
모델도 제품도 흐리게 촬영
물건의 선험적 감각만 담아

군더더기 없는 옷의 본질
구호의 지향점 잘 드러내


‘초점이 흔들린 패션 화보’

모순 투성이의 문장이다. 패션 화보는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광고다. 판매하고자 하는 아이템을 소비자들의 눈에 띄게 촬영하는 것이 패션화보의 본질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화보란 사물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다시 말 해 물건을 직접 보지 않고도 어떤 느낌일지 알 수 있도록 재질감이 살아있는 사진이다. 단번의 촬영으로 질감이 살아있는 사진을 얻기는 힘들어 이른바 ‘리터칭’이라고 부르는 후작업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모델은 배경이 되고, 아이템은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이러한 패션 화보에 정면을 반하는 화보가 나왔다. 사진작가 천경우가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대표 윤주화)이 전개하는 ‘구호(KUHO)’와 컬라보레이션을 진행했다.

천경우 작가는 지난 2011년 뉴욕 맨하튼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진행된 대규모 퍼포먼스 ‘Versus’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라섰고, 현재는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오는 4월 26일에는 젊은 작가 8명의 기획자로 나서,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도 진행한다.

그가 작업한 구호 2014 S/S 컬렉션 화보는 모델, 모델이 입고 있는 옷, 악세서리 등 화면에 들어있는 모든 요소가 초점이 나간 듯 부옇게 표현됐다. 선명하지 않고 부유하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봄비가 내려 사방이 차분했던 날, 천경우 작가를 만나 이번 작업에 대해 물었다.

작업은 일반 화보촬영과는 다른 프로세스로 매우 느리게 진행됐다고 한다. 천 작가는 모델과는 일을 잘 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만나기보다 특정 ‘역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별로 흥미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엔 일반인이 ‘대상’으로 등장했다. 카메라의 방향만 다를 뿐 동등한 관계라는 것을 인지 시키고 작업이 시작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문모델인 중국출신의 ‘씨씨 시앙(19)’이 있었다. 갑자기 이 사람에게 ‘직업을 주지 않는 것’이 목표가 됐다. 천 작가는 사전미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포즈ㆍ장식품ㆍ옷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는 이야기를 했다.

모델에겐 얼굴과 몸을 이용해 옷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패션’인데, 그것을 하지 말라고 주문한 것이다. “사람이 없이는 옷도 없는 것”이기에 사람에 집중하고 나머지 소품과 배경은 단순화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번 작업에선 옷과 사람의 관계 즉 물건과 사람의 관계를 고민했다. 휴대폰이 주머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집에 놓고 나왔던 기억…휴대폰을 찾아 주머니를 뒤지기 전까진 철썩같이 ‘주머니에 있다’는 존재감을 느낀다. 오래 사용한 물건은 실제하지 않더라도 느낌ㆍ감각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이 지점을 잡아냈다. 자연스럽게 선험적인 감각(sense), 직감(直感)의 의미와 ‘실재로 있음(presence)’ 을 조합한 ‘프레-젠스(Pre-sense)’라는 타이틀이 창출됐다.

씨씨는 19분 동안 물건을 들었고, 그 과정을 노즐을 열어 촬영했다. 그리고 다시 물건을 빼고 촬영했다.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의 감각만을 담아낸 것이다. 퍼포머티브한 프로세스를 통해 우리가 옷에 대해, 물건에 대해 사고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19분이란 시간도 모델이 직접 선택한 시간이다. 공교롭게도 나이와 같은 숫자다.

왜 모델에게 시간을 정하라고 했을까. “내가 19분 동안 같은 포즈를 취하라고 했으면 ‘고문’에 가깝다. 본인이 시간을 직접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피사체로서 작업에 임하는 수동적 관계가 아니라, 주도적 관계가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물은 예술가와 패션브랜드의 일반적인 컬라보레이션과는 확연히 달랐다. 예술가의 이름을 딴 라인을 런칭하거나, 특정 작품을 모티브로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통상적인 과정과 달리 이번 작업은 ‘천경우’ 이면서 동시에 ‘구호’를 담아냈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천경우 작가는 사실 ‘구호’라는 브랜드는 잘 몰랐다고 고백했다. 다만 이번 작업을 통해 만난 구호는 “조용하면서도 디테일이 있고, 잘 짜여진 공간같다”고 표현했다. 조용한 울림이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생경하다’고까지 표현 할 수 있는 이번 구호의 컬렉션 화보는 군더더기 없이 옷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구호’라는 브랜드와 옷을 매개로 하는 패션이 원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역설적으로 더 잘 드러난 예시로 보인다.

이한빛 기자/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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