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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남산은…신라 아베크族…아지트였다
1300년전 인구 100만의 거대 도시, 경주 곳곳 서구와의 활발한 교류 흔적

황룡사·호원사 탑돌이 국경 초월한 데이트… ‘쿠쉬나메’ 결혼동맹 신빙성 더해

경주 학예사들 “서양 귀빈과 주령구 따라 러브샷, 처용 등 서역인 참모 발탁 유행”


경주 인구는 현재 26만3000명을 조금 넘는다. 도심은 경주시청을 중심으로 형성돼 북으로는 포항에 인접한 안강까지 이어지는데, 남쪽으로는 북천(北川)에 이르러 딱 끊긴다. 북천은 이상하다. 도심 남쪽에 있으니 남천이라 할 법한데 북천이라 부른다. 북천 아래는 동쪽의 토함산, 남쪽의 남산ㆍ금오산, 서쪽의 선도산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평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엔 논밭 사이사이로 문화유적들이 다소 보이고 주택가는 별로 없다. 도시 남쪽을‘ 북’으로 부르는 이유, 그것이 알고싶다.

고려의 승려 사학자 일연은 삼국시대 역사를 정리하면서 “신라 전성기에는 서라벌에 17만8936호가 있고, 35개의 금입택(金入宅: 황금을 입힌 집)이 있었다”고 썼다. 당시엔 가구당 자녀가 보통 셋 이상이었으니, 5인 가족으로만 잡아도 89만4680명이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금의 3.4배다. 지금부터 1300~1400년 전 통일신라 시대 북천 이남 지역에 엄청난 크기의 번화가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연보다 100년가량 앞선 12세기 모로코 출신 아랍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1154년 신라를 포함하는 세계지도를 그려 넣은 ‘천애 횡단 갈망자의 산책’이라는 저서에서 “그곳에 가면 누구든 다시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매우 풍족하다. 그 가운데서 금은 너무나 흔해, 심지어 개나 원숭이의 목 줄도 금으로 만든다”고 기록했다.

유라시아를 잇는 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었던 경주의 7~9세기는 금빛 찬란했다. 동로마, 페르시아, 인도 등지의 방문객들은 신라를‘ 금이 많고 풍요로우며 여인이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하면서 한 번 오면 떠날 줄 몰랐고, 서라벌은 세계 문물과 문화가 넘치는 세계 5대 국제도시로 우뚝 섰다. 사진은 제5회 경주시 사진전에서 금상을 받은 박영희 작가의‘ 남산 신선암 일출’.          [사진사용허가ㆍ제공=경주시]

7~9세기 흔적을 찾아 처음 도착한 곳은 불국사역에서 2㎞가량 떨어진 원성왕릉, 괘릉이다. 798년 숨진 그의 능은 페르시아 무인 둘과 이국풍의 문인석 2개가 호위한다. 무인석 엉덩이 쪽에는 페르시아 무장 상인들이 차는 주머니(반낭)가 달려 있다.

불국사에서 경주코오롱호텔 쪽으로 나와 3.7㎞쯤 가면 구정동 대로변에, 이집트 피라미드를 닮은 사각뿔 모양의 방형분을 발견할 수 있다. 지역 유지의 묘로 추정된다. 한 변의 길이는 9m. 경주시청 이혜련 학예사는 “네 모서리 우주(隅柱:귀에 세운 기둥) 중 하나에 서역인 호위무사 모습이 부조돼 있는데, 지금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면서 “당시 신라가 좋아 정착하는 페르시아인들이 적지 않았고, 왕실과 귀족은 덩치 크고 용맹하며 충직한 서역인들을 참모로 두는 게 유행이었다”고 전한다.

구정동에서 북서쪽으로 7번 국도를 따라 8㎞쯤 가면, 북천을 2㎞가량 앞두고 안압지를 만나게 된다. 안압지는 벌써 열 번은 온 것 같다. 관광가이드는 자꾸만 ‘임해전지(臨海殿址)’ 또는 ‘동궁월지(東宮月址)’라는 생소한 이름을 부른다. 안압지는 방치되던 조선시대 ‘기러기와 오리만 논다’는 폄훼의 뜻으로 붙인 명칭이라, 원뜻을 찾아 바꾸었다는 것이다. 보통 인도ㆍ페르시아ㆍ중국 외교사절, 대상(大商)들은 개운포(지금의 울산 처용리 일대)나 감포를 들어오는데 임금이 바닷가에 직접 임해 영접해야 하지만, 직접 가기 어려울 때가 많으니 마음은 바다에 임하고 이곳에서 모시겠다는 뜻이란다.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 중 인동당초(덩굴) 문양이 많았는데, 이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양과 일치한다.

동서양의 오피니언리더들은 이곳에서 격의 없이 놀았던 흔적이 있다. 술마실 때 내리는 명령을 담은 주사위 즉 주령구(酒令具) 놀이다. 술 마시기 전 14면체의 주사위를 던지면 명령어가 나온다. ‘노래 없이 춤추기(禁聲作舞ㆍ금성작무)’ ‘얼굴 간지러움을 태워도 참기(弄面孔過ㆍ농면공과)’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任意請歌ㆍ임의청가)’ 등에다 요즘의 러브샷인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曲臂則盡: 곡비즉진)’까지 있다. 얼마나 즐거웠을지 상상이 간다.

임해전지에서 1㎞ 떨어진 대릉원에서는 5~6세기께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만들어진 인면유리구슬과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의 커트글라스(cut glass:무늬를 새겨 넣은 유리)가 발견된다.

9세기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믿을맨’ 페르시아인 석상. [사진제공=경주시]

차를 몰아 북천 다리를 넘어 포항 쪽으로 30분쯤 가다 보면 안강읍 북서쪽 어래산 자락 흥덕왕릉에 도착한다. 흥덕왕릉을 지키는 무사석상 역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빼닮은 페르시아인의 모습이다. 흥덕왕 재임 중 사치와 외제품이 범람하자 843년 해외명품 수입을 금지했다고 한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망하던 7세기 중엽 마지막 왕자가 당나라로 피신했다가 신라로 건너와 신라공주와 결혼하고, 결혼동맹을 맺은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이 676년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는 ‘쿠쉬나메’ 이야기도 실감이 난다.

지금은 경주 박물관에 보관돼 있지만 황성공원 인근 용강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인물토용 28점은 하나같이 개구쟁이 스머프 모자를 닮은 호모(胡帽), 즉 앞으로 약간 휜 뾰족한 복두를 쓰고 있다. 한때 신라와 당나라엔 ‘호(胡)’라는 접두어를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 선진, 첨단이라는 뜻이다. 궁중음악은 호곡, 귀족음식은 호식, 유행 패션은 호복, 절세미녀는 호희라고 불렀다. 호(胡)는 페르시아가 망하고 동진해서 정착한 지역 사마르칸트의 ‘소그드’를 뜻한다.

9세기 신라 학자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라는 문집 속에는 ‘속독(束毒)’이라는 시가 나타나는데, 서역의 탈춤을 묘사한다. 속독은 바로 소그드이다. 탈춤은 처용이 입국해 헌강왕에게 발탁될 때 추었던 바로 그 춤이다.

사마르칸트는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한 주(州)이다. 이곳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페르시아제국 시절 외국사절단 행렬도엔 2명의 신라인도 포함돼 있다. 상호 왕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온 서라벌에 페르시아 흔적이 묻어나는 것은 두 나라 간 교류가 장기적이고 전면적이어서 거의 ‘라-페 동맹’ 수준임을 느끼게 한다. ‘쿠쉬나메’의 신빙성도 커진다.

통일신라의 외국 귀빈 접대장소였던‘임해전지(臨海殿址)’. 사진은 박정란 작가의 경주시 사진전 입상작. [사진제공=경주시]

숱한 ‘강남’의 흔적들로 미뤄, 북천이 경주 남쪽에 있는데도 왜 그렇게 불렸는지 알 수 있다. 서라벌 강남은 지구촌 문물이 거래되고, 국적을 초월해 친구가 되는 대도시였다. 높이 70m가 넘는 당대 최고층 빌딩 황룡사는 지금으로 치면 송도국제도시 동북아트레이드타워에 견줄 수 있다.

서라벌은 서울이다. 청담동ㆍ이태원ㆍ명동의 밤은 화려하다. 여러 무리의 선남선녀가 황룡사에서 산책하다 마음이 맞으면 ‘지붕없는 박물관’ 남산으로 옮겨 데이트를 즐기고, 강북의 황성 인근 호원사에서 탑돌이를 하던 연인들은 ‘원나잇스탠드’도 감행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잘 생긴 페르시아 젊은 장교는 임금이나 귀족의 측근 참모가 되고, 바람둥이 페르시아 사관은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 늦게 노닐던 중 귀부인을 유혹해 ‘네 개의 다리’를 만들었다가 부인의 남편에게 들키기도 했던….

인구 100만에 육박하던 7~9세기 경주는 유라시아 해상ㆍ육로 비단길의 종착점으로서, 장안ㆍ바그다드ㆍ콘스탄티노플ㆍ아테네와 함께 문물과 풍요가 넘치는 세계 5대 도시였다고 영남사학자들은 전한다.

기와집이 빼곡이 들어차, 남산에서 데이트를 즐기다 비가 오더라도 산 아래 첫집의 처마 밑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몇 ㎞를 걸어도 비를 맞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지금 문화재보호구역 경주엔 신ㆍ증축이 엄격히 제한돼 있다. 그래서 찬란한 서라벌은 2014년에 응답하기 어렵다. 시민들 사이엔 “못살아도 자랑스럽다”는 의견과 “이젠 좀 먹고 살게 해 달라” 요구가 교차한다. 옛 건물을 생활공간으로 쓰는 프랑스 파리 정도는 아니더라도, 7~9세기 세계도시답게, 황룡사 복원과 함께 기와집 수만채가 북천 강남에 들어서는 식의 ‘개발’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주는 올 때마다 새롭다. 학생들의 개학 개강을 앞두고 테마 있는 경주여행을 해 보는 것은 ‘9세기 뉴욕’이던 서라벌에 대한 상상력을 살찌운다.

경주=함영훈 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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