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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조, 사도세자 묘(廟) 크게 지으려다 축소했다…조선왕실 건축도면 공개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5일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 관련 건축도면 42건 60매에 관한 현황공개와 가치규명을 시도한 조사연구보고서인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조선왕실 건축도면’을 발간했다.

‘세심궁도형’<사진1>은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에게 제향하는 궁묘(宮廟) 설계도인 ‘선희궁도형(宣喜宮圖形)’으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확인결과 1764년(영조 40년) 1~5월 사도세자의 궁묘(세심궁)를 건립하기 위한 후보지로 현장 설계 및 진행 상황을 그린 도면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모궁구묘도’<사진2>는 사도세자의 묘를 축소하여 숭교방으로 옮겨 수은묘(垂恩廟)로 고칠 때 그려진 이건 계획도이다. 세심궁이 수은묘로 고쳐지는 과정에서 영조의 손수 어필로 수정한 내용이 도면에 반영돼있다고 문화재청측은 설명했다.

영조는 둘째아들 선이 정쟁의 소용돌이와 자신의 ‘자결’ 명령 등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아사하게 되자 뒤늦게 ‘사도세자'라고 시호를 내렸고, 무덤에도 수은묘라는 묘호를 붙여준뒤 차후 일체 거론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당시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심한 죄책감을 느껴 당초 궁묘를 크게 지으려 했으나, 모종의 이유 때문에 축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모종의 이유가 심경의 변화인지, 다른 정파의 견제때문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세력의 강력한 저항이 사도세자 궁묘 축소의 근거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당초 서울 동대문 배봉산 언덕(현 서울시립대 자리)에 있었으나, 정조가 즉위한 직후 “나는 효장세자(사도세자의 형)의 양자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한다”고 선언하면서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안녕동)로 옮겨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묻었다.

이번에 공개된 도면은 궁궐 6건, 궁가(宮家:대궐밖에 나와살던 왕의 자녀, 후궁 거처)․궁묘(宮廟:왕의 친부모,왕에 오르지 못한 세사,세손의 묘) 9건, 1908~1925년 왕실건축 27건으로 나누어진다. 제작연대는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인 1764~1925년이며, 제작형태는 조선시대 전통방식인 간가(間架, 건축물의 구조를 칸으로 표시), 회화(繪畵)식 도형과 근대 작도(作圖)방식 도면의 두 부류이다.

이 도면들은 근대화 과정과 일제 강점기에 궁궐의 형태가 어떻게 바뀌어 갔는지, 건물의 배치 현황을 중요시한 간가도(間架圖)와 정밀화(精密畵) 형태의 도형들에 담겨져 있었던 전통방식의 건축 철학이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타임캡슐(Time Capsule)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왕조시대에는 궁궐의 건물 배치 상황이 외부에 노출될 수 없는 기밀 자료들이어서 왕조시대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일반에 공개될 수 있었다”면서 “현재 왕실 관련 도면들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도 다수 소장되어 있으며 분산된 자료들에 대한 종합적인 비교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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