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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기자의 만화독후감> 가슴 시린 독백, ‘3월의 라이온’
[헤럴드경제= 김상수 기자]<만화를 좋아하시나요? 만화는 추억이자 꿈입니다. 만화만큼 남녀노소 사랑받는 콘텐츠가 또 있을까요? 슬램덩크를 보며 가슴이 뭉클했고, 둘리와 함께 꿈을 키웠죠. 코난의 비상한 머리에 감탄하고, 풀하우스의 알콩달콩 사랑얘기에 가슴이 찌릿했던 기억들. 돌이켜보면 만화는 우리에게 책과 영화에선 접할 수 없었던 소중한 추억, 지식, 감성을 선물했습니다.

좋은 작품을 공유하는 건 만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특권이자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더니 멈출 줄 모르고. 교복도 머리도 땀투성이가 돼 가는데. 흐린 하늘 밑 강바람이 쌀쌀해 난 그녀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돼, 그저 그게 걱정돼 어쩔 줄 몰랐다.”

만화 ‘3월의 라이온’은 마치 한편의 일본영화 같다. 감정의 진폭이 크진 않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잔잔하면서도 몇번을 곱씹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츠네오나 조제의 나즈막한 독백을 보는 듯한 대사가 매 컷 이어진다. ‘3월의 라이온’을 읽는 데에 다른 만화보다 유난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이다. 


주인공 레이는 17세 고등학생. 그는 여러가지로 다른 고등학생과 다르다. 어린 시절 일찌감치 부모님을 잃고 양아버지 밑에서 크다 ‘출가’했다. 응당 저지른다면 ‘가출’을 할 나이겠지만, 그는 ‘출가’를 했다. 양아버지 밑에서 장기를 배우며 이미 프로에 입문했기에 경제적인 독립 역시 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출가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장기로 철저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양아버지의 사랑법 때문에 기존 가족은 어긋나기만 한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친자식에겐 곰인형과 게임기를 선물하지만, 레이에겐 장기말을 전해주는 양아버지. 장기가 인생의 전부인 아버지에게 장기말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친자식들은 아버지의 사랑법에 한없이 삐뚤어진다. 아버지를 뺏겼다는 질투심.

특히 4살 위 누나인 쿄코는 레이를 더욱 옥죄인다. 반항하며, 아버지를 미워하는 쿄코. 게다가 레이가 그녀에게 느끼는, 남남도 남매도 아닌 애매한 감정은 17살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차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떠나고, 세상과 담을 쌓는다. 그가 접하는 세계는 자신만의 집, 그리고 오롯이 자신 홀로 대결하는 장기판뿐이다.

‘3월의 라이온’은 장기를 소재로 한 만화이다. 그런데 장기는 사실 이 만화에서 부수적인 소재다. ‘고스트 바둑왕’처럼 스포츠물 만화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 17살 주인공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성장 만화’에 가깝다. 홀로 남겨졌다고느낀 레이는 혼자서도 살 수 있도록 장기에 몰두했지만, 점차 장기는 그가 이웃과 학교 선생님과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가 된다.

물론 17살의 혼돈기는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이웃에 사는 아키리, 히나, 모모 세 자매가 새로운 세계를 의미한다면, 4살 위 누나 쿄코는 어두운 지난날 같다. 불쑥불쑥 삶에 끼여드는 쿄코. 버릴 수도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좋아할 수도 없는 애증의 존재다.

어린 시절 방에 몰래 들어온 쿄코는 레이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오며 내뱉는다. “건들지마. 그렇지만 떨어지지마.” 그런 존재였다. “그녀는 폭풍처럼 강렬했다. 장기도 성격도 아름다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었다”는 레이의 독백 그대로다.

“누나도 나도 이렇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변할 수도 없는 채. 남매도 남남도 아닌 채.”

그렇다고 혼란스러워만 하는 건 아니다. 세 자매와 함께 새로운 세상에 눈뜬다. 왕따에 괴로워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히나를 보며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 작은 용사에게 마음 속으로 다시 한번 조그맣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다짐한다. 다리 위에서 ‘춤을 추듯 내 손을 이끌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에게서 세상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를 배운다.

아직도 레이의 성장통은 진행형이다. 이제 9권까지 출간됐으며, 레이는 여전히 방황하며 혼란스러워하며 또 감동하고 있다. 우리의 사춘기도 그랬을까. “도망치지 않았다는 기억을 원했다.” 갈지(之)자의 삶이면 또 어떤가. 때론 비틀거리고 또 때론 실패하기도 하지만 레이는 아직 도망치지 않았다. 또 그것이 17살의 특권이다. 레이의 선전을 기원하며, 레이의 대사를 끝으로 마무리해본다. 남매도 남남도 아닌 쿄코를 향한 레이의 독백이다. 

“견딜 수 없이 싫다. 이 끈적끈적 달라붙는 듯한 쿄코의 말투가. 무엇보다 이렇게 독기를 품은 말조차 더 듣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이.”

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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