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의도 이뤄지지 않은 법안 ‘떼처리’전망
‘사학법 개정안’ 상임위도 수정사항 모른채
본회의서 ‘방망이’가 두드려진 해프닝도
4월 본회의처리 법안중 일부 진행도중 상정
‘극한대치→대충타결→부실입법’ 올해도 계속
제2의 택시법·정년연장법 우려 목소리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이 멀다(日暮途遠ㆍ일모도원)’
여야의 극한 대치로 밥 먹듯 해 온 ‘상임위 보이콧’의 후유증이 연말 국회 전망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법안을 심사해야 하는 소위마저 여야 대치정국의 ‘희생양’이 되면서 제대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법안들이 무더기 ‘땡 처리’될 공산이 커진 것이다. ‘극한 대치→대충 타결→부실 입법’이라는 오명을 올해도 국회는 면키 어려울 전망이다. 임금피크제 같은 보완조치가 없이 도입된 정년연장법은 당장 내년 노사관계의 핵폭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올해 정기국회는 지난 10일 본회의에서 34건의 법안을 무더기로 처리했다. ‘법안처리 0건’ 정기국회란 오명을 벗기 위해 ‘논란이 큰’ 법안은 모두 논외로 남겨두고, 여야 의원들의 실적용 법안만 통과시켰다. 34건 법안 처리에 걸린 시간은 90여분 남짓. 상습적인 보이콧과 협상력 부재의 정치 탓에 뒷말 안 나올 법안들만 ‘떼 처리’ 된 것이다.
1년 내내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을 둘러싸고 진흙탕 싸움을 하느라 허송세월을 보낸 국회가 국정원 개혁법안과 예산안 처리를 두고 고비를 맞고 있다. 하지만 여야 간의 입장차가 워낙 커 예산안이 연내 처리되기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가 26일 오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고위정책-약속살리기 연석회의에서 국정원 개혁안에 대해 새누리당의 전폭적인 수용을 요구하고 있다. [박현구 기자 phko@heraldcorp.com] |
과거와 비교해도 올 국회는 유독 법안처리 실적이 떨어진다. 최근 5년간 정기국회 법안 통과 건수는 2009년 108건, 2010년 30건, 2011년 55건, 2012년 117건 등으로 평균은 77.5건이다. 그러나 올해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법안 통과 건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연평균 입법 수준을 맞추기 위해선 심도있는 논의가 생략된 채 대충대충 통과될 법안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국회 관계자는 “10일 본회의에서 처리된 안건은 소위 ‘알기 쉬운 법령 마련’처럼 여야 이견이 없는 법안들이다. 정치적 타협이 필요 없는 입법안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법안에 대한 ‘부실 처리’는 그간 국회의 고질병으로 질타를 받아왔다. 협상 없는 정치가 반복되면서 의원들이 개별법안에 대해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찬반 버튼’을 누르는 악순환인 셈이다.
이러다 보니 부실 의원입법은 때로 행정부나 시민사회와 정면 충돌하기도 한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거부권 행사까지 불러온 택시법, 임금부담 완화를 위한 임금피크제 도입을 뺀 채 통과한 정년연장법 등이 대표적인 예다. 올해 1월 1일 ‘초’를 다투며 통과됐던 법안 가운데 ‘사학법 개정안’은 법안의 핵심인 ‘심의’가 법사위에서 ‘심사·의결’로 바뀌는 황당한 경우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상임위 위원은 물론, 법사위원도 수정 사항을 모른 채 본회의 ‘방망이’가 두드려 진 것이다.
‘부실 입법’이 관행화된 것은 국회법 예외 규정이 일상화된 결과란 지적이다. 국회법 제93조2항은 법안이 통과돼 국회의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한 뒤 1일(24시간)을 지나지 않고는 본회의에 상정할 수 없다. 이 조항은 그러나 교섭단체대표와 협의를 거치면서 번번이 무시되고 있다. 올해 4월 본회의에서 처리된 54개 법안 가운데 일부는 본회의 진행 도중 부랴부랴 상정되기도 했다.
연말 정기국회 상황은 더 심각하다. 지난 2011년 말에는 김정일 사망에 대한 ‘조문 파동’이, 지난해 말에는 ‘대선 정국’이 연말 국회를 뒤흔들었고, 올해엔 1년 넘게 끌고 있는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사안에 대해 여야가 극한 대치를 이어가면서 법안 논의는 뒷전으로 밀렸다. 이 때문에 300명 국회의원들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하느냐”는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윤희웅 민 정치컨설팅 여론분석센터장은 “졸속 법안 심사로 국민들이 직접 피해를 입거나 미비한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정치권을 불신하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며 “향후 법안 처리와 예산안 처리에서는 정쟁과 반목을 재연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석희 기자/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