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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을 찾아서>⑪공주 고마나루명승길…금강을 따라 과거와 현재가 흐르는 길
“차령 이남에 산천의 맑은 기운이 쌓여서 큰 고을을 이룬 것에는 오직 공주가 제일이다.…물이 용담, 무주 두 고을에서 근원을 발하여 금산에서 합쳐져 영동, 옥천, 청주 세 고을을 지나 공주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또 꺾여 사비강이 되어서는 더욱 더 큰물을 이루어 길게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간다. 이에 공주는 계룡산으로 진산을 삼고 웅진으로 금대를 두르고 있으니 그 산천의 아름다움을 알겠도다.”(신증동국여지승람 中)

고마나루는 공주를 말한다. 금강 가에 배가 드나들던 넓은 나루터가 고마나루 혹은 곰나루였고, 곰주로, 그리고 공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뒤 웅진이라 한 것도 곰 웅(熊), 나루 진(津)의 뜻을 취한 것이다.

고마나루명승길은 공주의 과거와 현재를 오고간다. 무령왕릉이 있는 고분군을 걸으며 웅진백제시대로 거슬러 갔다가도 연미산 정산에서는 공주의 도심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과거든 현재든 공주 산천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해서 이름도 명승길이다.

공주는 북쪽으로는 천안시와 아산시, 동쪽으로는 대전시가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청양군과 부여군이 잇닿아 있다. 길을 나서려는 이가 전국 8도 어디에 살든 오기 부담스럽지 않은 위치다. 정부청사가 이전한 세종시에서는 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애닮픈 곰 여인의 전설=고마나루명승길을 걸으려면 먼저 금강을 타고 전해내려오는 고마, 곰 전설을 먼저 가슴에 담아야 한다.

한 나무꾼이 나무하러 곰나루를 건너 연미산 아래로 왔다가 여인네로 변신한 암곰과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됐다. 자식들을 낳고 살았지만 나무꾼은 결국 곰으로부터 도망쳐 금강을 건너 고향 공주마을로 돌아갔다. 곰이 새끼들을 데리고 강가로 와서 남편을 애타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끝내 나무꾼이 돌아오지 않자 곰은 새끼들을 차례로 물에 빠트리고 자신도 빠져 죽었다. 그 이후 금강이 범람하거나 풍랑이 거칠어질 때마다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곰사당을 지어 제를 올렸다.

명승길의 시작점이자 끝 지점인 고마나루 터 옆에는 지금도 자그마한 곰사당이 남아있다. 주변으로는 소나무들이 시원하게 뻗어있다. 소나무 사이로 가다보면 현대 작가들이 만든 곰 가족 조각상이 나온다.

고마나루인 웅진이 백제의 수도가 된 것은 서기 475년 백제 제22대 문주왕 때 일이다. 제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한성 왕궁에서 전사한 뒤 부랴부랴 남쪽으로 천도한 곳이다. 웅진백제시대는 475년 문주왕에서 538년 성왕까지 5대, 64년간 이어졌다. 고마나루에서 1~2km만 걸어가면 웅진시대로 데려가 줄 송산리 고분군이 나온다. 짧은 거리지만 중간중간 산길에, 내내 오르막이라 시간은 충분히 생각하고 걷는게 좋다. 

#연미상 정상
연미산은 고마나루명승길의 전체 코스는 물론 공주의 도심이 한눈에 조망된다. 연미산은 산의 생김새가 제비꼬리를 닮았다 하여 유래한 이름이다. 금강은 서쪽으로 흐르다가 연미산에 부딪혀 남서쪽으로 급히 휘어 돌아간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위기의 백제를 일으킨 무령왕=삼국을 호령한 신라의 도읍 경주를 잠시 떠올려 보자. 삼국시대 당시의 왕릉이 있는지. 없다. 천마총 등 ‘총’이 있을 뿐이다. 같이 발굴된 유물의 귀함 정도로 왕릉이었을 거라 미뤄 짐작할 뿐 그 주인을 알수 없기에 ‘왕릉’이 아닌 ‘총’으로 불린다.

그런데 공주엔 무령왕릉이 있다. 동글동글 나즈막한 언덕처럼 보이는 송산리 고분군엔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의 밝혀진 무령왕릉을 비롯해 고분 7기가 모여있다. 명승길은 이들 고분을 감싸고 모두 돌아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능은 7호 분이다. 1971년 여름 5~6호 분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도굴꾼들도 무령왕릉을 제단에 사용한 자리 쯤으로 여겼기에 발굴과 함께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왔다.

묘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고 쓰여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임을 분명히 했다. ‘영동대장군’은 중국 양무제가 무령왕에게 내린 칭호며, ‘사마왕’의 사마(斯麻)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왕의 무덤을 쓰기 위해 토지신에게 무덤자리를 돈으로 샀다고 하는 증명서, 매지권(買地券)도 발견됐다. 걸으며 무한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다.

#송산리고분/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은 고마나루명승길 1.16㎞ 지점에서 시작된다. 백제시대 웅진 도읍기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모두 7기가 있다. 무령왕 외에는 다른 왕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천혜의 요새, 공산성
=전국의 약재상들이 몰려들었던 산성시장을 통과하면 길은 다시 백제의 왕성 공산성으로 이어진다. 웅진과 공주, 백제시대와 현대를 오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538년 성왕이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간 5대에 걸친 백제 왕들이 공산성 안 왕궁에서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에는 웅진성이라 했고, 고려 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 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성의 동서남북에 영동루, 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등 성문이 있다.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주 출입문이 서문에 해당하는 금서루다. 백제 때는 고마나루를 이용했지만, 조선 시대에는 공북루 아래 큰 나루터가 있어 금강을 건넜다.

#공산성 성벽길
공산성은 웅진 백제의 64년간 왕성이었던 곳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공산성 안에는 백제를 비롯해 통일신라, 조선시대의 유적도 많이 남아있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올라가보면 딱 천혜의 요새다. 외세에 밀려 공주로 내려온 백제인들 입장에서 한쪽 사면은 금강을 끼고, 다른 쪽 사면은 깎아지른 벼랑으로 막아선 지금의 산성 자리보다 왕성의 적임지는 없었을 터. ‘택리지’에도 “공주읍 북쪽에 작은 산 하나가 있는데 강가에 서리고 얽힌 그 모양이 공(公) 자와 같다. 산세를 따라서 작은 성을 쌓고 강을 해자로 삼아, 지역은 좁으나 형세는 견고하다”고 묘사해놨다. 성벽은 2.6km로 한 바퀴 둘러보는 데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 의자왕이 공산성에 잠시 거처하기도 하였고, 신라 헌덕왕 14년(828)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고, 1623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는 인조가 피난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명승길 17.91km 지점의 연미산 정상에서는 금강 건너편에서 공주의 구도심과 신도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공주=안상미 기자/hug@heraldcorp.com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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