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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가난한 코리아’에서 스마트폰 · 車수출 ‘퍼스트무버’ 로
가난한 부부가 있었다. 이들의 사랑은 절절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춥고 배고팠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들 부부는 서로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아내는 남편의 낡은 시계줄을 바꿔주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팔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긴 머리카락 뿐이었다. 아내는 결국 머리카락을 잘라 판 돈으로 남편의 시계줄을 구입해 선물했다. 하지만 그때 남편은 이미 아내의 머리핀을 사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시계를 팔아버린 뒤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이맘 때면 회자되곤 하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의 내용이다.

‘머리카락을 판다’는 것을 소설에서나 볼 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시간을 조금만 되돌려보면 우리의 현실 또한 그랬다. 무역 1조달러 시대,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춥고 배고팠던 때 우리도 먹고 살기 위해 머리카락을 팔았다. ‘잘살아보세’라는 국가기조 아래 돈 되는 것이라면 수출품목에 이름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스마트폰, 자동차 등 최첨단 IT 제품을 수출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과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이지만, 우리의 수출품 역사를 되짚어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머리카락에 소변도 수출했던 시대=1960년대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입에 풀칠하기 급급할 만큼 가난했다. 이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에 불과했다. 아프리카의 가나와 똑같은 수준이었다. 때문에 ‘소변’ ‘돼지털’ ‘은행잎’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수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의 소변에 들어있는 우로키나아제가 뇌졸중 치료제를 만드는 주원료로 사용됐는데, 우로키나아제 1㎏은 2000달러의 가치가 있었다. 때문에 공중화장실마다 ‘한 방울이라도 통 속에!’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소변을 모아 수출한 돈이 1973년에는 50만달러, 1974년에는 150만달러에 달했다. 심지어 돼지털, 쥐털, 뱀, 메뚜기 등도 수출했다. 길에 떨어진 은행잎을 모아 독일의 제약회사로 팔았고, 강원도의 자작나무는 고급 이쑤시개로 가공돼 수출됐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공산품이 주요 수출품으로 부상해 섬유류(40.8%)와 가발(10.8%)이 전체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당시 엿장수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부녀자의 머리카락을 수집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이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어머니 이야기는 드라마의 흔한 소재였다.

수출된 한국산 가발과 속눈썹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국에서 중국산 가발의 수입이 금지되면서 한국산 가발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다. 1964년 첫 가발 수출액은 1만4000달러였지만 이듬해 가발 수출액은 155만달러에 이르렀다. 정부는 가발기능양성소를 세워 가발 수출에 박차를 가했고,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발은 우리나라 총 수출의 약 10%를 차지할 정도로 효자 수출품목이었다.

▶중공업 전성시대=1970년대 후반 중화학공업이 육성되면서 수출품이 경공업제품에서 중공업제품으로 바뀌었다. 이 당시 수출품에는 기계, 선박, 철강 등 중화학 제품이 40~50%를 차지했다. 현대그룹이 노르웨이, 그리스 등에 선박을 수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중동 해외건설 붐이 일면서 우리나라 건설노동자가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도 40억달러에 이르렀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 등 대외적인 여건이 불안했지만, 우리나라는 1977년 수출 10억달러를 기록하며 수출역사의 새 전기를 맞게 된다.

1980년대의 수출품 구조를 살펴보면 전자, 전기, 자동차, 조선, 기계류 등 중화학공업 제품의 수출비중이 50∼60%에 달한다. 특히 전기전자 분야의 수출이 급격히 증가, 전체 수출의 30%를 차지하게 된다. 삼성전자 등 국내 전자업계 수출은 1980년대 초반 20억달러 규모에 그쳤으나, 1989년에는 180억달러로 큰 성장을 이룬다.

특히 1980년대는 자동차가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목 중 하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해외진출을 시작한 우리나라 자동차업계는 1989년 21억2000만달러의 자동차 수출이라는 성과를 보게 된다. 현대자동차의 소형승용차 ‘엑셀’이 미국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세계 자동차업계에 노크를 한 것도 1980년대 후반 무렵이다.

▶첨단기술로 세계 시장을 호령하다
=반도체는 1992년부터 섬유, 철강, 자동차를 물리치고 우리나라 수출품목 1위로 부상했다. 수출규모도 1990년 45억4100달러에서 1995년 176억5900만달러로 급증하는 등 한국의 효자 수출품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94년에는 단일품목으로는 최초로 수출 100억달러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0년대 들어서도 반도체는 변함없이 수출 1위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박의 세계 시장점유율이 54%에 이르면서, 2011년 선박에 수출 1위 자리를 내줬다. 선박 중 수출 기여도가 가장 높은 것은 탱커(원유나 액체를 운송할 수 있는 배)로 2011년 기준 약 240억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 특히 유조선ㆍ시추선ㆍ조명선 등 특수선은 세계 1위를 지키며 선박 수출 강국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 에너지 기업들은 원유를 수입해 고부가가치의 석유화학 제품으로 재가공ㆍ수출하면서 석유제품도 수출 목록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분야별, 우리나라 최초 수출품은?=우리나라 자동차 중 처음 수출된 것은 현대자동차의 ‘포니’다. 1976년 7월 에콰도르에 포니 자동차 5대를 수출한 것이 최초다. 자체 개발한 휴대폰 수출의 경우 삼성전자가 1988년 애니콜 SC2000을 수출하면서 시작됐다. 신발은 1962년 국제상사, 동신화학공업주식회사가 미국, 캐나다 등의 국가로 23만8000달러에 해당하는 신발을 수출한 것이 첫 신호탄이었다. 선박은 1967년 대한조선공사와 대선조선이 바지선 30척을 베트남에 수출한 것이 처음이었다. 최초의 섬유수출은 1959년 지금의 혜양섬유 전신인 동광 메리야스 공장이 미국에 스웨터 300장을 선적한 것이 첫 기록이다.

황유진 기자/hyjgo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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