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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다큐>자유로운 영혼, 당당한 고졸, 크리에이터 남궁연이 사는 법
[헤럴드경제=김영상ㆍ이슬기 기자]재즈 뮤지션, 방송인, 공연기획자, 유명 대학 강사 등 숱한 타이틀의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 대한민국 방송가에 거의 사상 최초로 빡빡 민 머리를 들이댄 기인(奇人). 독학으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드럼 실력자가 된 드러머.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달변가라는 호칭과 함께 성 담론을 공개적으로 내밀어 화제가 된 파격적 언어 마술사. 학력을 숨기기 바쁜 세상에서 당당히 고졸임을 커밍아웃해 화제가 된 학력 파괴의 프런티어. 고졸 출신의 첫 대학 강사. 학력 가방 끈이 짧음에도 해외 석학과 최첨단 지식을 막힘없이 논하는 모습을 보여준 천재형 지식인. 게다가 학생때는 나이트클럽에 가는 등 일탈의 삶을 살다가 아버지로부터 정신 차리라고 고발당해 소년원까지 갈 뻔했던 문제아.

직선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인물, 바로 남궁연(47)이다.

남궁연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약간의 긴장이 느껴졌다. 수많은 이를 인터뷰했지만, 겉으로 봐도 복잡하고 난해(?)해 보이는 이 인물을 어떻게 해석할지 갖은 생각이 교차했다. 만남은 그의 집에서 이뤄졌다.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자신이 태어난 집이란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남궁연이 던진 것은 ‘열정’이었다. 그는 지금의 삶은 ‘크리에이터(creator)’로 살고 있다고 했다. 크리에이터? 그게 뭘까. 호기심을 머리에 굴릴 새도 없이 멘트가 날라온다.

“전 마흔살까지는 주로 방송을 했고 음악을 했습니다. 지금은 크리에이터로 일하고 있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는 다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광고나 디자인을 기획하는 사람이라면, 크리에이터는 ‘창의력으로 성취를 이뤄내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속사포처럼 다음말이 쏟아진다. “공상과 상상은 차이가 있어요. 공상은 생각만 하고 끝나는 것이고, 상상은 공상이 구체화돼 세상에 없던 것이 현실로 될 수 있는 것이죠. 크리에이터는 허무맹랑하다고 지탄받는 공상을 상상으로 발전시키고, 결국에는 현실화시켜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제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는거죠.”

<사진>남궁연은 개구쟁이다. 달변가는 딱딱할 수 있는데, 그의 달변에는 유머가 녹아 있다. 표정도 다양하다. 애플로부터 받은 한정판 포스터를 자랑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궁연. 한국 뮤지션 최초로 이 포스터를 받았다고 했다. 애플 광고를 찍고 음악 작업에 애플 제품을 많이 사용해서 그런 듯 하다며 신나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그러고보니 대충 짐작이 된다. 김구라 이상의 독설가지만 달변가로 방송 섭외 1순위로 꼽히는 그가 최근 왜 TV 화면에 나오지 않는지, 국제행사나 디지털포럼 같은 컨퍼런스에서 시그널, 피날레 음악에 집중하고 굵직한 문화행사 등에서 공연기획자로 ‘퍼포먼스 인생’에 빠져 있는지 말이다.

그래도 크리에이터가 뭘 하는지 어렵다고 하자 그는 잠시 뜸을 들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 봉이 김선달입니다. 누군가가 궁금해 하는 것을 나에게 물어보면 해답을 찾아주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공연 기획 같은 것 만은 아닙니다. 장사 안되는 유통업체의 매장 마케팅일 수도 있고, 유권자 표심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는 정당의 허점을 짚어주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일 수도 있고, 휴대폰의 계층별 구매 전략일 수도 있죠. 요점은 클라이언트가 답을 못찾는 일을 (의뢰가 들어오면) 제가 상상력을 발휘해 구해주는 것이죠.”

남궁연 크리에이터(이하 이렇게 칭한다)는 덕분에 방송 쪽 일을 안해도 먹고 살만하다고 했다.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풍족하게 살고 있어요. 클라이언트는 밝힐 수 없지만, 1년에 두 건 정도 씩은 계속 엄청 큰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크리에이터=남궁연’ 인생에 주력할 겁니다.”

남궁연 마흔살 직전까지의 음악과 방송 인생은 많은 사람들이 어느정도 알고 있지만, 그 이후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크리에이터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 그의 삶을 역추적해보는 것은 참 드라마틱할 것 같다.

▶내 직업은 크리에이터=남궁연 크리에이터는 잘 나가는 방송인이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남궁연의 고릴라디오를 진행했다. 솔직한 입담과 성 담론까지 제시하는 파격적인 진행으로 프로그램은 히트했다. 청소년 고민도 들어주는 멘토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방송에서 너무 자유분방하다며 밥맛 없다(이 말은 그가 표현한 것이다)고 하는 안티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지난 2007년 이었을거예요. 서울 디지털포럼 연사로 초청됐죠. 저도 이유를 몰랐어요. 고졸인 제가 그런 행사 연사로 초대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라디오 진행을 하고 있어 ‘라디오의 미래’를 주제로 얘기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하버드대 미디어 연구소에 있는 교수와 맞붙어 토론을 했는데, 그 경험이 저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준거죠. 디지털포럼이 제 인생을 바꿔 놓은 겁니다.”

<사진>드럼은 남궁연에겐 생명이나 다름없다. 그의 열정은 드럼으로부터 나온다. 그는 국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실력을 뽐내는 최정상급 드러머다. 드럼은 독학으로 배웠다. 드럼과 만났을때 “아, 이건 내가 잘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집에가 잠을 자는데 드럼 생각만 나더란다. 그가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으로 인생을 전환하게 된 것도 드럼이라는 음악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구체적인 사연은 이렇다. 당시 국내에선 싸이월드가 한창 잘 나가고 있었다. 사진을 올리면서 도토리를 나누는 기상천외한 사업은 대히트였다. SNS가 유행하기 전이었는데, 당시 포럼에 왔던 외국 사람들로부터 “싸이월드는 안된다. 트위터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보여준 초창기 트위터는 허접, 그 자체였다. “애국심의 발로도 있고 해서 당연히 저는 반박했죠. 싸이월드는 배경 음악도 골라서 깔 수 있고 예쁘게 꾸밀 수도 있는데 트위터는 이게 뭐냐”면서.

그때 외국 석학 중 한명이 얘기한 것이 “싸이월드는 왜 사용료를 받는지 이해가 안간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저는 우리 삼성 애니콜이 앞으로 세계 일등을 하고, 싸이월드가 세계 일등을 할 것이라 말했는 데, 불과 몇년이 지나지 않아 싸이월드가 정말 급하게 쇠락하기 시작하더니 트위터가 최고의 SNS로 떠오르더군요.”

그때 만났던 이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물었다. “도대체 그때 내 생각이 어디가 틀렸던 것인가”라고.

이메일에 이런 내용으로 답이 왔단다. “사업은 ‘부동산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사업은 아주 커다란 나대지를 조성해 거기에 아이스크림 장수도 마음대로 들어와서 팔게 하고 솜사탕 장수나 놀이기구를 운영하는 사람, 음악을 트는 사람 등이 자유롭게 들어와 정말 탐나는 공간이 되도록 하고, 그렇게 해 비싼 임대료를 받거나 튀겨서 나대지 부동산 전부를 파는 것이다.”

그들의 답은 쇼크였다. 나대지를 훌륭하게 만들어 임대료 수입을 챙기든지, 그것을 팔면 막대한 이문이 남는데 왜 싸이월드 같이 공간을 만들어 직접 아이스크림 파느냐는 지적이었다. 사업의 ‘사’자도 모르는 소탐대실이라는 말. 바로 “왜 사용료는 받는지 이해가 안간다”는 그 말과 일맥상통하는 답이었다.

여기서 남궁연 크리에이터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외국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소프트 파워의 시대가 온다고. 당신(남궁연)같은 사람들, 창의력이나 생각을 가지고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뜨는 시대가 온다고요. 더이상 공간도, 물건도 다 혼자서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도 했죠. 거기서 얻은 게 ‘아, 우리나라에는 플랫폼이 없었구나’하는 자성이었죠.”

이 일을 겪고 나니 방송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더란다. 새로운 일에 대한 투지가 생기더란다.

소프트파워를 이용해 할 수 있는 게 뭔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얼리 어답터가 되는 게 중요했다. 컴퓨터를 활용해 최신 동향을 찾았고, 독학으로 마스터했다. 트위터나 SNS도 열중했다. 그가 공연 기획에 사상 처음으로 트위터 홍보를 활용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상상의 밑천은 결국 과학기술입니다. 갑자기 생뚱맞은 결론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첨단 기술의 흐름을 예측하고 읽어낼 수 있다면 역으로 다른 방식의 생각, 즉 역발상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더니 그만의 비밀, 비법 하나를 알려주겠단다. “단언하는 데 세상에 나오는 모든 가전제품의 설명서만 제대로 읽어도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드에게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크리에이터 자질 중 하나가 ‘설명서’에 있다는 것이다. 설명서를 빠짐없이 읽으면 세상에 있던 기술이 왜 없어졌는지, 어떤 기술로 대체됐는지, 미래엔 어떤 기술이 나올지를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좋은 비법은 화장실에 설명서를 비치하는 것이죠. 하루에 한두번은 꼭 볼테니까요. 하하하.”

그가 2010년 인텔과 협업으로 소셜미디어 기반의 공연인 ‘jazz2.0’을 기획한 것도, 2011년 국립극장에서 ‘이정윤과 에트왈’ 무용공연때 단돈 20만원을 들여 음악과 IT가 결합된 동영상으로 화려한 오프닝을 박수 속에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같은 첨단기술에 대한 독학이 바탕이 됐다.

▶내 운명을 바꾼 송두리째 바꾼 ‘체로금풍(體露金風)’=남궁연 크리에이터는 고졸이다. 가난해서, 집안 환경이 좋지 않아서, 공부가 싫어서 고졸이 된 것은 아니다. 고졸은 그가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고졸임을 굳이 밝히지 않고 혹은 숨기기도 했지만, 그는 달랐다. 학력이 인생 서열을 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일찌감치 주창해왔다.

남궁연을 만나는 날은 공교롭게도 지난 7일, 수능 날이었다. 점수 잘 맞았다고 환호하는 이들이 있고, 한쪽에선 우울한 이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대한민국 학부모와 학생의 희비가 교차하는 날.

남궁연에게도 이 날은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 물었다. 수능 날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점수가 좋은 학생에겐 축하할 일이지만, 결과가 안좋은 학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절대 낙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키가 아주 작은 데 단 한번의 ‘농구’로 시험을 치러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고 우열을 규정하는 그런 느낌에 좌절감도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재수를 하든, 취업을 하든,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인생의 길을 걷든 ‘배움과 성공’은 ‘대학’이라는 장소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열중하면 자동적으로 찾아온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요.”

자신이 걸어온 길, 뒤돌아보면 대학과 전혀 관계없었다는 자신감에 이같이 적확한 말을 던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편견에 대한 불만도 내비친다.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다. “마라톤 경기를 할때 4분의1 정도인 10킬로미터 지점에서 누군가 선두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해설자는 우승후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능 시험의 결과 그것 하나로 모든 가능성과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뒤처진 그룹도 얼마든지 우승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사회가 열린 눈으로 바라봐 줘야 합니다.”

남궁연 크리에이터는 흔히들 말하는 명문가(그는 이런 표현을 싫어한다) 출신이다. 외할아버지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바로 아랫동생인 고(故) 윤완선 씨다. 아버지 고 남궁식 박사는 서울대 화학공학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뼈대 있는 학계와 정계 가문의 피가 섞여 있는 셈이다.

그런 그가 대학을 안나왔다고 하는 것에 뭔가 불편한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일반적 잣대를 들이댈 일은 아니다. 그가 대학을 안나온 것은 순전히 그의 선택이다.

남궁연이 신학대 2년째 였을때다. 은사 교수 중 한분이 계셨는데, 독특했다. 선불교를 갖고 기독교를 해석하는 신선한 시각으로 유명했다.

교수님이 어느날 체로금풍(體露金風)에 대해 얘기했다. ‘체로’는 ‘본체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뜻이고, ‘금풍’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뜻한다. 직역하자면 ‘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완연히 드러난다’라는 것이다.

어원은 이렇다. 가을 날 스님 두 분이 단풍놀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 그런데 마침 단풍이 다 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동자승이 울상을 지었다. 스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동자승은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기껐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단풍이 모두 져버렸으니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니냐”고 했다. 스님은 이에 “너의 눈에는 단풍이 지고 드러난 저기 나뭇가지의 선과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느냐. 그리고 그 나뭇가지로 지나가는 바람의 아름다움은 어떠한가. 너는 네가 보고 싶은 것 만을 보려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꾸짖었다는 얘기다.

교수님의 이 이야기를 듣고 남궁연은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아, 정말 내가 헛살았구나. 내가 보고 싶은것만 보고 살면서 수많은 고통을 받아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교수님은 그런 감정을 보고서로 제출하라고 했다. 뭔가를 상실했을 때 사실 상실한 것은 누리고 있는 것의 100분의1도 안되는 데 왜 인간은 그리도 고통에 몸부림 치는가 하는 것들.

“제가 처음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생활을 할 때에 느꼈던 상실감이나 두려움은 되돌아 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대학은 떨어졌지만 나에게는 재수를 할 기회가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친구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죠. 그런데 내가 보고자 했던 ‘대학’, 그 하나가 사라지자 주변의 아무 것도 안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얘기들을 묶어 ‘나는 내가 보고싶은 것들만을 보면서 내 인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는 그런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리포트를 본 교수님 말이 이랬다. “남궁연, 너는 비유를 써서 냈는데, 그렇게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은 네가 깨달았다는 증거다. 알고 있는 자만이 비유할 수 있다. 너는 다 깨달았다”라고.

그런 얘기를 들은 후 다음주에 수업에 출석했는데, 교수님은 “남궁연, 자네는 지난주에 이미 깨달았는데, 학교를 왜 왔나” 라고 묻더란다.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말씀이 진리로 와 닿았습니다. 그리곤 ‘아 네, 저는 깨달았으니 그럼 나가보겠습니다’라고 하며 학교를 나온 것이죠.”

정말 그랬다. 그리곤 다시는 학교를 가지 않았다. 믿지 않을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남궁연이 대학간판을 걷어찬 것이 바로 이 일화 속에 녹아 있다. 인생 방향을 정한 그가 독학으로 드럼을 마스터할 수 있었던 것도, 학력 껍데기를 의식하지 않고 음악 인생에 정진할 수도 있었던 것도, 다소 종교적 철학을 풍기며 달변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젊은날의 깨달음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학간판이 중요하지 않다고 일찍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공부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것은 아니다. 그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꾸준히 공부한다. 남궁연은 남들과 거꾸로의 인생을 산다. 그는 남들이 잘때 깨어 있으며, 남들이 깨어있을때 잠을 잔다. 밤을 새워 일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는 사람에게는 ‘절대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람이 창의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정규교육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 관심있는 것을 해야 하고, 또 나아가 절대적인 자기 시간이 하루에 한 두시간 정도는 있어야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정규교육을 많이 받아도 그것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창의와 상상이 생길 수 없는 것이죠.”

남궁연은 자신을 ‘질문병자’라고 표현한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절대로 잠을 못잔다. 크리에이터 일을 하면서 더욱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그럴때면 아버지 친구 분들인 교수들한테 전화를 한단다. “일어나자마자 아버지 친구들한테 전화를 드려요. 그러면서 열 효율에 관한 것, 공기역학에 대한 것, 양자론에 대한 것 등을 꼬치꼬치 묻습니다. 하도 전화를 많이 해 지겹다는 분도 계세요.”

<사진>크리에이터에겐 첨단 컴퓨터 등의 IT기술은 24시간 같이하는 친구다. 흥겨운 비트와 메트로놈 박자, 화려한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융합’을 담당(?)하고 있는 그의 보물인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궁연.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남궁연은 말한다. “살아갈때 길이 막히면 질문하세요. 자신의 삶의 접점에 갈등이 있을때 물어보면 됩니다. ‘나는 공부에 원래 관심이 없으니까’, ‘나는 고졸이니까’, ‘세상은 원래 그러니까’ 등의 마음으로 포기하지 말고, 질문을 통해 열정과 한계 사이의 접점을 만드세요.”

당당한 고졸, 당당한 지식인, 남궁연이 살아가는 법의 동력은 바로 ‘질문’인 셈이다. “청소년들 중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질문하세요. 제 트위터(@Namgoongyon)로 얼마든지 연락하세요.”

▶사부ㆍ사모곡은 내 운명의 짊=시종일관 즐거운 표정의 그도 아픔은 있다. 철이 든 후 찾아온 사부곡, 사모곡 때문이다.

남궁연은 어린시절 말썽쟁이였다. 아니, 문제아였다. 엄한 집안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자꾸 비뚫어져가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도 실망했다.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다. 일탈하고 또 일탈했다. 신촌에서 알아주는 ‘주먹’으로 소동도 많이 피웠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버지가 학생 신분인 그가 나이트클럽에 간 사실을 알고, 고발까지 했을까.

“세상에 자식 잘못되라고 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정신 차리게 해 사람 좀 만들겠다는 절박함이었겠지요.”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머리를 깎았다. 다시는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생전 너무 불효했다는 뼈아픈 반성. “한마디로, 자학이었죠.”

그가 인터뷰가 진행된 신촌 집을 영원히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추억의 집을 영원히 나서는 순간, 불효의 아픔은 더 커져만 갈 것이기에.

“윗층 응접실은 아버지가 쓰던 서재고요. 드럼이 있는 스튜디오(그는 집안에 스튜디오를 차려놨다)는 부모님이 쓰시던 안방입니다. 제가 움직일때마다 항상 부모님이 같이 계시는 것이죠.”

삐딱했던 소년을 크리에이터로 만든 것은 어쩌면 그의 부모였나 보다.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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