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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송미술관,조선 최고 문화부흥기 ‘진경시대’의 화원 작품 한자리에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둥실 뜬 보름달이 빛을 발하는 고요한 밤. 인적이 끊긴 담장 아래선 한 쌍의 남녀가 깊은 정(情)을 나누고 있다. 여인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입을 맞추려는 남자는 전립을 쓰고, 지휘봉을 든 게 어느 영문의 장교(무관)임에 틀림없다.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치켜든 여인도 야릇한 감흥에 취한 모습이다. 이렇듯 노상에서 연정을 꽃피우는 게 이뤄질 수 없는 관계인 듯하다. 옆 담모퉁이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여인은 이 밀회를 성사시킨 장본인일까? 아니면 둘을 질투하는 연적일까? 알쏭달쏭하다.

달밤에 밀회를 나누는 남녀의 애틋한 심사를 담은 이 그림은 혜원 신윤복(1758~?)의 전신첩(국보 제135호)에 실린 ‘월야밀회’다. 담장 안쪽에서 세 남녀의 모습을 훔쳐보는 작가의 시선도 느껴진다. 이 그림은 조선 최초로 키스신을 다룬 그림으로 꼽힌다. 그러나 천재 화원(畵員)답게 혜원은 농염한 그림에서도 격조를 잃지 않고 있다. 탁월한 표현력을 지녔던 혜원은 자신의 화첩을 통해 조선 사대부 가문의 내밀한 일상을 오늘 우리 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림이 아니고선 이룰 수 없는 성취다. 혜원전신첩 속 작품은 단옷날 풍속을 재기발랄하게 그린 ‘단오풍정’, 시냇가에서 가슴을 드러낸 채 몸을 씻는 여인네를 그린 ‘계변가화’ 등 한 편 한 편이 모두 걸작이다.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에 실린 혜원 신윤복의 ‘월야밀회’(달밤에 몰래 만나다). 종이에 채색. 35.6x28.2cm. 
[사진제공=간송미술관]
‘혜원전신첩’에 실린 혜원 신윤복의 ‘휴기답풍’(기생을 데리고 단풍놀이를 가다). 종이에 채색. 35.6x28.2cm.
 [사진제공=간송미술관]


혜원의 풍속화를 비롯해 조선 최고의 문화부흥기였던 진경시대 궁중화가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관장 전영우)은 가을 정기 전시를 ‘진경(眞景)시대 화원전‘으로 꾸몄다. 일년에 봄, 가을 딱 2주씩만 대중에게 미술관을 공개하는 간송은 13~27일 진경시대 화원 21명의 그림 중 각 시기 특징을 잘 보여주는 그림 80여점을 소개한다.

‘진경시대’는 조선 숙종대(재위 1675~1720)부터 정조대(재위 1776~1800)까지 125년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는 조선왕조 후기문화가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며 중국과는 다른 우리만의 문화예술을 화려하게 꽃피웠던 절정기다.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은 “조선초기를 지배했던 주자성리학의 자리를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심화 발전시킨 조선성리학이 대신하면서, 고유이념이 생겼다는 자긍심은 회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며 “비로소 우리의 자연과 풍속, 그 내면의 정신성을 드러내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토대가 마련됐다”고 밝혔다. 특히 사서삼경과 주역에 정통했던 사대부화가 겸재 정선(1676~1759)는 흙산과 바위산이 어우러진 우리 산천을 유려하게 표출했으며, 의관도 조선 고유의 복색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겸재 정선과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의 한 세대 뒤의 화가인 현재 심사정(1707~1769)과 표암 강세황(1713~1791)은 그러나 진경산수에 반발해 명대의 남종문인화를 수용하며 조선남종화를 발전시켰다. 

단원 김홍도 ‘초원시명'(파초 정원에서 차를 맛보다). 종이에 담채. 37.8x28cm                                  [사진제공=간송미술관]

하지만 이들보다 한 세대 뒤 화가들은 다시 현재 세대에 저항하며 겸재의 고유한 진경문화를 계승ㆍ발전시켰다. 그리곤 마침내 진경시대 절정기를 구가했다. 특히 단원 김홍도(1745~1806)와 고송유수관 이인문(1745~1824) 등 도화서 화원들은 겸재의 진경산수를 더욱 심화시켰다. 화원들은 문화절정기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 더구나 그들을 길러낸 영조와 정조는 조선조 최고의 문예군주이자, 스스로 뛰어난 화가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번 전시에는 진경시대 초기 화가인 벽은 진재해(1661~1729)에서부터 겸재에 사사한 불염재 김희겸(1710~?), 현재 심사정을 흠모한 호생관 최북(1712~1786), 정밀사생화에 능했던 화재 변상벽(1730~?)의 작품이 나왔다. 또 진경풍속화의 대미를 장식한 단원 김홍도와 고송유수관 이인문, 한양의 도회풍속을 달필로 묘사한 혜원 신윤복의 대표작도 볼 수 있다. 

김득신 ‘북악산'. 종이에 수묵. 36.5x29.8cm                                                                                              [사진제공=간송미술관]

이인문의 격조 높은 산수 및 풍속화, 풍속화가로만 널리 알려진 단원 김홍도의 빼어난 산수화도 내걸린다. 솔숲에서의 오붓한 연회를 서정적으로 그린 혜원의 ‘송정아회’도 눈길을 끌며, 긍재 김득신의 담백한 산수화 ‘북악산’ 등도 놓쳐선 안 될 작품이다.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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