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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L의 역사>운동권주류→진보정당→원내진출...시대착오 생각은 그대로
[헤럴드경제=신대원 기자]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이 연루된 내란음모 피의사건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가운데 이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민족해방(NL)계열의 역사도 주목받고 있다.

반독재 민주변혁 운동 과정에서 생성된 NL의 역사는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NL은 1986년 개헌정국에서 태동했다는 게 정설이다.

주체사상의 대부라는 평가를 받다가 북한인권운동가로 변신한 김영환씨가 ‘강철서신’을 제작 배포하며 주체사상을 남한에 본격적으로 이식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당시 NL계열의 첫 체계적 조직이라 할 수 있는 구국학생연맹은 대중투쟁기구인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적 투쟁위원회(자민투)’를 결성하고 대중운동을 전개하면서 지하에서 지상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이들은 개헌투쟁과 반외세 투쟁의 향방을 놓고 운동진영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반미자주, 반파쇼민주, 조국통일을 3대 투쟁과제로 제시하고 한·미 합동군사훈련 ‘팀 스프리트’ 반대투쟁, 전방입소 반대투쟁 등을 벌였다.

NL은 이후 1980년대 중·후반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구성체 이행논쟁 과정에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내세워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제시한 제헌의회(CA)계열에 맞서 이론을 가다듬고 조직을 확대하는 등 몸집을 불려나갔다.

NL과 CA 구도는 직선제 개헌과 그 결과로 노태우 정권이 탄생하면서 NL과 민중민주(PD)계열의 구도로 재편돼 이어졌다.

NL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대학 학생회를 대부분 장악하면서 PD의 도전을 물리치고 운동권 내에서 주류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진보개혁진영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PD가 내세우는 주장이 다소 복잡하고 어려웠던 반면 NL의 논리는 상대적으로 단순명쾌했다”며 “미국의 정치개입과 주한미군 범죄 등이 맞물리면서 젊은 대학생들이 감상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NL은 199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이 급격히 몰락하자 진보정당을 통한 활로 모색에 들어갔다. NL은 당초 시기상조론과 무용론을 들어 독자적인 진보정당운동보다는 야권과의 비판적 연대를 선호했다. 하지만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면서 국회 원내 진출이라는 목표 아래 진보정당에 적극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석기 의원이 주도한 ‘경기동부연합’의 중앙조직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도 2002년 민노당에 공식참여했다.

하지만 국회 원내 진출이라는 목표가 달성되자 수면 아래 잠재돼 있던 NL과 PD의 갈등과 앙금이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지난해 운동권의 패거리 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당내 비례대표 경선 부정과 애국가 부정 등 종북논란으로 분출됐다.

결국 한때 운동권 주류였던 NL계열은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종북논란의 상처를 채 씻어내기도 전에 내란음모 혐의에 연루됨으로써 종말 위기에까지 처하게 된 셈이다.

신대원 기자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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