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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예,현대미술과 만나니 그림이 되네..포스코미술관 기획전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펜으로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쓰는 손글씨보다 휴대폰 자판이 익숙해진지 오래다. 또 한자보다는 영어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젊은 세대에게 동양 정신문화의 집약체인 서예는 안중에 있을 리 만무하다. 고루한 걸로 여기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동양 조형예술의 뿌리인 서예는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인기가 꽤 높다. 내로라하는 푸른 눈의 추상화가 중 서예기법을 작업에 앞다퉈 차용하는 예가 적지않다. 저들에겐 캘리그래피가 외려 더 참신한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동양의 서예와 서양의 추상화를 한자리에 만나는 특별전은 그래서 더욱 반갑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포스코미술관은 서예를 매개로 동서양 미술의 관계를 살펴보는 ‘글자, 그림이 되다‘전을 22일 개막한다. 오는 10월 22일까지 두달간 열릴 이번 전시는 동서양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붓이 노래하고, 먹이 신명나게 춤추는 ‘필가묵무(筆歌墨舞)’의 경지를 만끽해보는 자리다.

이번 전시는 세가지 측면을 다루고 있다. 우선 동양서예와 난해한 추상화를 미술관에 나란히 전시함으로써 서예는 마치 그림처럼, 서양의 추상화는 마치 서예처럼 다가오도록 했다. 양극단을 함께 음미하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보다 색다른 예술체험이 또 있을까 싶다. 

운보 김기창 점과 선 시리즈. 한지에 수묵. 330x180cm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
고산 황기로의 서예작품 유상 송왕영.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

이를테면 16세기 선비화가 고산 황기로의 초서 작품 ‘송왕영’은 이우환의 추상화 ‘선으로부터’와 함께 내걸렸다. 분명 한시를 풀어쓴 초서이지만 이우환의 추상화와 함께 전시되자 고산의 글씨 또한 한폭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탁월한 필법의 소유자인 고산은 이 작품에서 물 흐르듯 써내려가면서도 꺾을 땐 꺾고, 돌릴 땐 과감히 돌리는 자유자재의 초서를 구사했다. 진사시에 합격해 별좌(別坐)를 지낸 고산은 만년에 낙동강 서쪽 보천산에 정자를 짓고, 필묵과 독서를 즐겼다. 그 은유자적에서 우러난 글씨는 모든 걸 초탈한 듯 우아하다.

운보 김기창이 사람키만한 큰 붓으로 가로 3.3m의 대형 화폭을 휘몰아치며 그려나간 ‘점과 선‘시리즈는 이탈리아 화가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과 짝을 이뤘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같은 운보의 역동적인 검은 선은, 수직으로 녹색의 캔버스를 예리하게 내려그으며 칼자국을 낸 폰타나의 간결한 작품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서예에서 기반한 운보의 그림이 더 추상화에 가깝고, 폰타나의 명징한 추상화는 외려 가는 붓에 온 정신을 투입해 써내려간 일획의 선 같다.

산정 서세옥 춤추는 사람들. 종이에 수묵. 174x130cm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

이밖에도 먹으로 인간형상을 쌓아올려간 서세옥의 수묵화는 미국 작가 샘 프란시스의 액션페인팅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샘 프란시스의 추상화 또한 인간의 모습을 반추상으로 그린 것이어서 두 작품은 붓으로 휘두른 그림이란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다음으로 이번 전시는 서예야 말로 동양 정신철학과 예술의 근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결정적 차이는 문자이다. 이런 문자를 예술적 소재로 직접 사용하는 서예는 옛 선비문인들에게 군자로써 덕을 쌓는 자기수양의 방편인 동시에, 우주 만물의 진리를 담는 행위 그 자체였다. 이렇듯 문자로서의 의미와 함께 서예는 문학적 내용의 발현이자, 아름다운 미적 감각을 드러내는 회화적 요소도 지니고 있음을 출품작들은 말해준다.

아울러 20세기 추상미술 중 동양의 서예에서 발원한 것이 적지않음을 이번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사물을 재현하지 않고 색, 선, 형 등의 추상적 형식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서양 추상미술인데 서예야말로 이와 맞닿아 있는 예술인 것이다. 

루치아노 폰타나 Concetto Spaziale, Attesa, Waterpaint on canvas, 33x24.2cm,1964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
샘 프란시스 SFF1635, Acrylic on canvas, 353x231cm.1990. [사진제공=포스코미술관]

이에따라 이번 특별전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추상으로의 변화를 관통하고 있는 동양의 서예정신을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 한국의 추상미술, 유럽의 앵포르멜(Informel)까지 조망하고 있다. 따라서 출품작은 매우 다양하다. 16세기 서예가 운봉 백광훈의 ’야도어가’에서부터 원교체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의 행서가 나왔다. 또 안평대군, 표암 강세황, 추사 김정희, 위창 오세창의 작품도 전시된다. 파리에 동양화 붐을 일으키고, 문자추상을 개척했던 고암 이응노의 작품과 운보 김기창의 선 굵은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또 서화일치를 넘어선 남관, 윤형근, 윤명로, 이강소, 오수환의 회화도 출품된다.

외국작가 중에는 프랑스 화가 앙드레 마송과 피에르 술라주, 독일 작가 A.R 펭크와 뤼페르츠의 회화가 내걸린다. 이들 작가는 서예가 지닌 추상성과 정신성을 자신의 작업에 응용했던 작가들로, 그들의 작품이 전통서예와 나란히 전시됨으로써 ’동양 서예정신의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게 한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관람하면서 한국미술의 뿌리를 돌아보고, 현대미술과 서예의 함수관계를 차분히 음미해보면 좋을 듯하다. 무료 관람. 02)3457-1665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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