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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를 부른 ‘史禍’…그 시작은 史草였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대기록물을 남긴 조선의 첫 사화(史禍)는 예종 때다. 예종은 ‘사초(史草)실명제’를 실시해 사초를 쓴 이들의 이름을 남기도록 했다. 사관이었던 민수(閔粹)는 당시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적 기록을 사초에 남겼다. 그런데 느닷없이 실명제를 실시하자 후환을 두려워해 사초를 조작했고,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른 사관들의 사초 조작까지 밝혀진다. ‘민수의 사옥(史獄)’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사관들이 처벌을 받는다. 이후 사초실명제는 폐기된다.
조선의 최대 사화는 16세기를 이태 앞둔 1498년 무오(戊午)년 때다. 사림파 사관 김일손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넣은 게 발단이다. 의제는 진시황에게 멸망한 옛 초나라의 왕족으로 후에 왕에 오른 항우(項羽)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연산군을 꼬드겨 당대에는 볼 수 없는 사초를 본 훈구파는 사림파가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며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인 피의 숙청을 일으킨다. 김종직 등이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의 목을 벰)당하고, 성종 때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했던 사림이 지방으로 밀려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는 논란은 결국 국가기록원의 사초까지 뒤지게 됐고, 사초가 실종된 사실마저 드러났다. 여야의 중심세력인 강경파는 끝장을 볼 태세다. ‘노무현은 NLL을 포기한 빨갱이’ ‘박근혜는 부당하게 정권을 잡은 협잡꾼’. 둘 중 하나가 입증될 때까지. 상대를 정치적으로 죽이겠다는 싸움이니, ‘피의 사화’를 충실히 답습하는 셈이다. 올해가 계사(癸巳)년이니 ‘계사사화’라는 이름이 붙을 만하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리는’, 참 대단한 정치다.
에필로그. 무오사화로 명맥만 남게 된 사림은 불과 6년 후 조선 최대의 피의 숙청인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훈구파에 복수한다. 이후 터진 기묘사화(己卯士禍)는 훈구파의 사림에 대한 반격이다. 둘의 싸움은 선조 때 사림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사림은 다시 분열돼 붕당정치가 시작되고, 당장 선조 때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시작으로 광해군 때 인조반정(仁祖反正), 숙종ㆍ영조 때 경신(庚申)ㆍ기사(己巳)ㆍ갑술(甲戌)ㆍ정미(丁未) 등 4대 환국(換局, 당파 간 정권교체)을 거치며 정적에 대한 피의 숙청이 계속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계사사화’가 ‘피’를 보지 않길 바랄 뿐이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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