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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추상미술의 출발’ 알린 김환기의 점화(點畵) 등 종이작업을 만난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1968년 1월 2일= Oil on Paper(종이 위에 유채)를 캔버스에 옮겨서 완성했다. 이 해의 첫 작품인 셈이다. 포도주를 혼자 마시다. 선(線)인가? 점(㸃)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

1월 23일=(하늘을) 나는(飛) 점(㸃),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 이런 걸 계속해보자.

1월 26일= 일을 하며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간혹 울 때가 있다. 음악, 문학, 무용, 연극 모다 사람을 울리는데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 울리는 미술은 못할 것인가.

2월 1일= 어제 하던 일(Oil on Paper)을 끝마치고 새로 5점을 했으니 가장 다작(多作)한 날인가. 새로운 감흥이 나는 것 같다. 예술(창조)은 하나의 발견이다. 피카소가 이 생각에 도달했다는 것은 참 용한 일이다. 그렇다. 찾는 사람에게 발견이 있다. 일을 지속한다는 것은 찾고 있는 거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세계(자연)가 아닐까.


5월 1일=오늘의 미술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가질 수 있는 모든 형태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7월 2일=작가가 늘 조심할 것은 상식적인 안목에 붙잡히는 것이다. 늘 새로운 눈으로, 처음 뜨는 눈으로 작품을 대할 것이다.

1970년 6월 23일=모처럼 청명. 잊고 지냈던 강신석 씨가 편지 속에 내가 실렸던 기사를 (첨부해) 보내오다. 편지의 구절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 했다.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 앞바다 돗섭에 보리가 누렇다 한다. 생각나는 것이 많다. 부산에서 향(鄕)과 똑딱선을 타고 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가던 때···. 맨하튼···. 지하철을 타고 뻐꾸기 노래를 생각해 본다”.

한국 추상미술의 개척자 수화 김환기(1913~1974) 화백이 1960년대말~1970년대초 미국 뉴욕에서 작업하며 썼던 일기의 한 대목이다.

수화 김환기는 고국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마다하고, 쉰을 넘은 나이에 뉴욕으로 떠났다. 그리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점화(點畵)와 반(半)추상화를 무수히 제작했다. 분출하듯 쏟아져 나오는 열정과 아이디어를 회화로 옮기며, 각종 실험을 거듭하고 싶었으나 그에겐 캔버스를 살 돈이 빠듯했다. 그래서 신문지며 폐기처분된 전화번호부 등을 찢어가며 그 위에 오일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이렇게 작업한 것들이 오늘 전해지는 김환기의 종이 작업(Oil on Paper)이다. 푸른 점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김환기의 점화는 밤하늘의 은하수, 때로는 깊은 우물 속에 잔잔히 울려퍼지는 음향을 연상시킨다. 이 일련의 점화는 오늘날 한국 추상미술의 태동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작가의 아내 김향안은 기록에서 “바탕에 인쇄기름막이 형성된 신문지가 물기를 흡수해 마르면서 마치 다듬질을 한 것처럼 팽팽해지고, 안료의 색상이 한층 빛나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환호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 시기 김환기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며 얻은 작가적 발견은 그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맑고 투명한 물감의 액체가 종이(신문지)에 머금으며 화면서 서서히 새어나오거나 뿜어져 나오는 듯이 보이는 성질을 그대로 살려 김환기만의 맑고 명징한 동양적 추상화인 ‘전면 점화’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서를 서양적 추상화 기법으로 표현하며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구현한 김환기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Works on Paper: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대표 조정열)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는 김환기의 종이 작품 중 대표작을 골라 60점이 내걸렸다. 종이 작업 이전에 비해 훨씬 밝아진 색감 등을 통해 김환기 작업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자리다. 서울 전시가 끝나면 작가의 고향인 전라도로 옮겨져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8월 28일~ 9월 22일)가 이어진다.

전시를 꾸린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은 “수화 선생이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일기 쓰듯 작업한 종이 작품(Oil on Paper)들은 신문지, 한지 등 다양한 종이의 물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작품세계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점화작업의 포트폴리오가 된 종이 작업은 Oil on Linen과 Oil on Cotton 못지않게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며 “지난해 김환기 회고전을 많은 이들이 관람했듯 이번 전시도 많은 관람객이 찾아 김환기의 예술 실험을 함께 음미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전시는 7월 30일까지. 02)2287-3500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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