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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영주 소수서원--폐허의 도시에 꽃피운 ‘유교의 메카’ㆍ최초 사립대학
 [헤럴드경제=영주] “동서남북 30리 안의 사람은 모조리 죽여라”

1457년 가을, 영남의 큰 도시 하나가 피비린내 속 하룻밤에 증발했다. 관군의 눈에 띈 사람은 양반이든 노비든 닥치는 대로 살육되고 온 도시는 불길에 휩싸였다.

죽은 사람의 수가 얼마인지 셀 수 조차 없었다. 그 시신을 갖다버린 죽계천(竹溪川)은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해 무려 7km 하류 마을에 가서야 멎었다. 그 마을은 그때부터 ‘피끝마을’로 불렸다.

‘남순북송(南順北宋)’…‘한강 이남은 순흥이요, 이북은 송도’라며 영화를 누리던 소백산 남쪽 기슭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의 증발사다.

하루새 ‘역모의 도시’로 낙인 찍혀버린 순흥에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수많은 시신을 수장한 죽계천. 이곳에 소수서원을 다시 세웠다.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세조)에 오르자 1457년 수양의 동생 금성대군이 유배지 순흥에서 이보흠 순흥부사와 극비리에 조카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한다. 영남의 수많은 인사들이 가세했다. 이 때 한 노비가 이보흠의 집에 숨어들어 이 비밀문서를 훔쳐 달아났고 결국 ‘거사’는 꿈도 펴보지 못한 채 발각돼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죽음을 맞았고 영월에 유배간 단종도 곧바로 사사된다.

이 ‘역모의 싹’이 튼 순흥은 졸지에 풍비박산이 났다. 주민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집은 있는 대로 불태웠으며 도호부의 땅은 쪼개고 쪼개 영천(영주)과 풍기, 봉화, 단양, 영월, 태백 등으로 편입시켜 ‘싹’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순흥은 남은 땅에서 순흥현으로 강등됐다. 역사에서 말하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이 때 거사의 본거지였던 큰 사찰 숙수사(宿水寺)도 당간지주만 남기고 모조리 불 타 버렸다. 부석사(浮石寺)와 함께 이 일대에 ‘불국토’를 형성했던 사찰이었다.

폐허의 도시, 순흥은 암흑기를 거쳐 86년이 지나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1543년 이 불국토의 땅에 이번엔 유교의 요람이 등장한다.

사라진 불국토에 유교의 요람이 들어섰다. 끊긴 학문을 이어가기 위한 서원이 들어섰다.

풍기 군수로 온 신재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이 지역 출신 고려말 유학자 안향(安珦) 선생이 공부했던 숙수사 터에 그의 뜻을 기려 1543년(중종 38년)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학문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했다.

주세붕이 이곳에 왔을 때 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이 죽계천에 밤마다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피의 도륙’이 있고나서 1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하루 아침의 날벼락에 원혼들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주세붕은 내천에 있는 큰 바위에 붉은글씨로 ‘敬(경)’이라 새기고 제를 올리니 원혼들이 고이 잠들었다. ‘敬(경)’은 ‘공경’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듯 하나씩 수습되자 각지에서 유생들이 몰려왔다. 서원도 활기를 찾았다.

주세붕 군수는 조선의 근본사상이 되는 유학(儒學)을 가르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또한 풍기 주민들에게 산삼을 가삼(家蔘)으로 재배하는 기술을 보급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1548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 선생이 백운동서원에 대해 조정에 사액을 건의하자 1550년 16살의 명종(明宗)은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을 써서 사액하고 사서오경 등 책과 토지, 노비를 파격적으로 지원,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공인사학으로 우뚝 서게 된다. 미국의 하버드대학 보다 무려 93년 먼저 설립됐다고 하니 우리도 자부심을 가져야겠다. 백운동서원은 이때부터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한국 정신문화의 메카로 우뚝 섰다. 이후 퇴계 선생은 성리학을 집대성, ‘동방의 주자(朱子)’로 불렸다.

명종 임금의 친필 현판이다.

소수서원은 왕명을 받은 대제학 신광한이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 즉,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으로 여기서 ‘소(紹)자와 ‘수(修)’자를 따 이름을 지었다. 이렇게 이름이 정해지자 왕이 붓을 들었다.

소수서원은 이후 각지의 서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영향을 끼쳤고 전국에 서원 바람의 촉매제 역할을 했는데 조선말 철종때에는 400여개에 이르렀고 그 중 영남에 173개나 세워졌다.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이 난립한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소수서원은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가 됐다.

‘선비의 고장’ 영주, 소수서원은 오래전부터 찾고 싶었던 곳이었다. 이른 여름의 뙤약볕이 유난히 따갑던 날, 영주시청 전병일 계장님과 필자의 벗이기도 한 풍기읍 정달완 계장과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퇴계 선생의 16대손 이용극 선생을 만나 ‘명강의’ 들을 기회를 얻었다.

매표소를 지나면 200~300년생 소나무 숲 속을 뚫고 지나간다. 350년 전 1000그루를 심었다고 하는데 학자수(學者樹)라고도 한다. 출발부터가 상쾌하다. 

소수서원 진입로에서 200~300년된 소나무가 상쾌하게 맞이한다.

숲의 오른쪽에 높다란 돌기둥, 당간지주가 서있다. 정축지변 때 숙수사가 불탔지만 이 돌 만큼은 온전하게 남아 사라진 불국토의 아픔을 전했다. 보물 제 59호다.

근처에 500년 넘은 암수 한 몸인 은행나무 고목이 있다. 1000년이 넘었다고도 한다. 한 줄기로 땅 위로 나와 같은 굵기로 두 갈래 갈려 자랐는데 한쪽 갈래에서만 열매가 맺힌다고 한다.

숲의 끝 죽계천에 이르니 건너편에 허름하고 초연한 모습의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퇴계 선생이 짓고 나서 ‘군자산의 풍취에 취하고 죽계천의 찬 물에 취해 공부에 임하고 풍류를 즐긴다’ 해서 취한대(翠寒臺)라 이름 지었다.

정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큰 바위에 ‘敬(경)’이라 새겨진 ‘경자바위’가 있다. 무참히 살육된 사람들의 시신이 수장됐던 곳으로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주세붕 선생이 새겼다. 이 ‘경’자 바로 위에는 조금 작은 흰글씨로 ‘白雲洞(백운동)’이라고 쓰여있다. 이는 퇴계 선생이 썼다고 한다.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자를 새기고 빨간칠을 한 후 제를 올렸다는 '경자바위'다. '백운동'이라는 하얀 글씨도 보인다.

이제 소수서원 출입문 앞 절벽, 또 하나의 정자가 있다. 경렴정(景濂亭)이다. 이 정자는 가장 오래된 서원 정자 중 하나로 주세붕 선생이 1543년 세웠고 현판은 퇴계 선생이 제자 황기로(黃耆老)에게 쓰게 했는데 처음엔 스승 앞에서 떨려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한다.

스승이 자리를 피해주자 다시 붓을 든 황기로의 글씨는 마치 용이 비천하는 듯한 빼어난 글씨를 썼는데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이 글을 보고 놀라 이곳에서 중요한 인물이 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글자 일부분을 잘라내 버렸다고 한다. 그 현판은 소수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경렴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周敦頤)’의 호에서 ‘염’자를 따오고 ‘높인다’는 뜻에서 ‘경’자를 붙였다고 한다. 우주생성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에 대해 연구하고 새로운 유학이론을 창시한 그를 그만큼 높이 우르러봤다.

입구에는 또 흙으로 네모난 제단을 조성했는데 성생단(省牲壇)이라고 한다. 문성공 회헌 안향 선생의 사당에 매년 봄가을 3ㆍ9월 초정일 제사때 쓸 소를 간품하는 제단이다. 전국에서 가장 크고 우량한 소를 골라 제례에 쓴다.

앞쪽 흙을 다져놓은 곳이 제단이다. 정자는 '경렴정'으로 작은 사진은 퇴계의 제자 황기로가 쓴 원래 현판글씨. 마치 용같다.

출입문(홍살문)을 들어서면 바로 강학당(講學堂) 건물이다. 우람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 강의실이라는 의미로 보면 된다.

강의실의 사방에 문이 달려있다. 특이한 구조다. 툇마루는 건물사방으로 빙 둘러 연결돼 있으며 마당에서 바라보면 건물의 모양새가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확연히 든다. 보물 제1403호로 지정돼 있다.

홍살문 입구에서 보면 강학당 왼쪽 편 사당을 별도 담을 쌓아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가 있다. 문성공 안향 선생의 제향을 올리는 묘다. 담장 밖의 소나무들도 기이하게 묘를 향해 몸을 숙이고 있다. 이 사당 역시 보물(제1402호)로 지정돼 있다. 공자가 아닌 안향 선생을 주향으로 모셨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눈여겨 볼 것은 강학당과 문성공묘의 배치 문제다. 서원에서는 이것도 법칙이 있다. 퇴계 선생 후손답게 이용극 선생님은 멋지게 설명해 주신다.

서원에는 학교 기능의 강학당과 제사 기능의 사당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학교를 앞쪽에, 사당을 뒤쪽에 세우는데 우리나라 서원 대부분이 이를 따라 배치하지만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다. 우리나라 전통 위차법(位次法)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배워가니 재밌다. 동쪽 보다는 서쪽을, 학교 보다는 사당을 더 우선시 한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16대손인 이용극 선생께서 소수서원의 강학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 사당이 문성공묘다.오른쪽 끝의 지붕은 강학당. 즉 강학당은 동쪽에 묘는 서쪽에 배치한게 특징이다.


뒤쪽 건물들도 하나씩 죽 둘러봤다.

하나의 건물로 된 직방재와 일신재가 있는데 직방재는 원장의 거처, 일신재는 일반 교수의 거처다.

아주 작아서 귀여운 건물, 장서각은 도서관 격이다. 그 앞의 돌기둥은 정료대(庭燎臺)라고 하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가로등이라니 놀랍다.

맨 뒤쪽 건물은 영정각으로 안향, 주세붕 선생 등 6명의 초상화를 모셔두고 있다. 진품은 이웃 소수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안향의 초상화는 국보 제 111호이고 주세붕의 초상화는 보물 제717호로 귀중하게 다뤄지고 있다.

영정각 앞에는 해시계인 일영대도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본 강학당. 아래 사진은 직방재-일신재 건물과 장서각, 영정각(왼쪽부터).
회헌 안향 선생 초상화(왼쪽)와 신재 주세붕 선생 초상화(오른쪽).

또 한쪽 귀퉁이에 있는 소박한 건물 두 개, 학생들이 기거하던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소수서원은 1888년까지 350년간 무려 4200여명의 유생을 배출했다. 퇴계 선생의 제자들은 대부분 이 서원 출신이다.

소수서원은 충효예학이 살아숨쉬는 선비정신의 산실이었다. 공부 보다는 예를 우선시(先禮後學) 했다. 인성문제가 사회문제로 불거지고 있는 오늘날이다. 학생들은 점수 따기 위해 공부에만 매달려야 하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인륜이 무너지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옛날에는 버릇없는 아이에게 호통쳐서 고쳤지만 요즘은 타이르기만 해도 큰 화를 입는 세상이 됐다. 어느게 옳은 건지 모르겠다. 소수서원을 여행하면서 적어도 이런 문제 한번쯤 고민해 볼 수 있다는게 다행스러울 뿐이다.

여기 기와집 몇 채가 눈으로 즐길 수 있는 풍경 보다 무형의 가르침, 정신적으로 주는 메시지가 큼을 아는 순간 그 가치는 배가될 것 같다. 이 서원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러했다.

소수서원은 죽계천 건너 뒤쪽으로 이어져 있는 소수박물관과 영주선비촌,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을 두루 연계해서 여행하면 멋진 타임머신 여행이 된다. 선조들의 향기를 좇아가는 것도 힐링투어가 된다. 소수서원은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추진 중이다.

멋진 여행 후엔 인근의 횡재먹거리한우(054-638-0094)에서 영주 한우의 참맛을 즐길 수 있다. 영주시민들은 영주 한우가 적어도 전국에서 두번째로 맛있다고  자부한다. 아주 연하고 맛있다.

이젠 역모의 도시, 폐허의 도시 옛 순흥도호부를 ‘역사문화특별시’로 만들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
■ 유학, 유교 그리고 성리학의 도입 : 공자, 맹자의 도덕적 사상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유학(儒學)이라고 하며 이를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을 유교(儒敎)라고 말한다. 하지만 유교는 내세관을 갖는 종교는 아니다.

이 유학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부터 들어왔다. 고구려, 백제는 3~4세기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孔子)는 기원전 사람이다. BC 551~BC 479에 살았고 이후 1500~1600년이 지나 남송시대 주희(朱熹, 다른 이름으로는 朱子ㆍ1130~1200)가 철학적 이론을 가미해 새로운 유학을 집대성했다. 이를 주자학 또는 성리학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공자의 유학을 구유학, 주자학을 신유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선비의 고장, 선비의 물맛 '영귀천'이다. 물맛 좋다.

주자학은 이 고장 순흥 출신인 회헌 안향 선생이 1290년 원나라 방문때 백록동(白鹿洞)서원에서 성리학(주자학)에 심취,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껴오면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초가 됐다.

이후 조선개국과 함께 이 고장 출신 삼봉 정도전이 역성혁명한 국가의 기틀 마련을 위해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며 조선 중기 퇴계 이황 선생이 꽃을 피워 중국도 부러워하는 유교국가로 발전했다. 퇴계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이후 일본과 중국은 물론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다.

결국, 우리나라의 유교는 사실상 고려, 조선시대 영주 출신 인사들이 도입, 계승, 발전시켜 왔다.

■ 두번 잿더미가 된 순흥 : 도시 전체가 두 번이나 완전히 불에 타버린 비운의 도시 순흥. 순흥(順興)은 고구려 때 급벌산군이었고 신라때에는 급산군이었다. 고려때 흥주도호부로 커졌으며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의 태(胎)를 잇따라 묻으며 순흥부로 승격됐다. 이때 태장(胎藏, 후에 일제에 의해 胎庄)이란 마을이름도 생겼다. 1413년에는 지방읍으로서는 격이 아주 높은 순흥도호부가 됐다.

‘남순북송(南順北宋)’이라 할 만큼 번창했던 순흥은 조선시대 99칸 짜리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이를 두고 고래등 같다고 했다.

세조 때 금성대군이 이곳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돼 온 도시가 전소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며 행정구역도 강등됐다.

이후 1907년11월10일 식민지화에 혈안이 된 일제가 소백산의 의병 500명을 소탕하러 왔다가 의병을 도운 순흥부를 또 다시 전소시켜 180여채의 읍 가옥이 모조리 화마에 휩싸이는 참사를 겪었다.

‘참화의 도시’ 순흥은 이제 ‘역사문화특별시’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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