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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함영훈> 1926년 보다 못한 2013년 6월10일
[함영훈 미래사업본부장] 병인년 4월26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가 승하했다. 제위에 오른지 20년만이다. 즉위한지 4년만에 나라를 빼앗기고, 16년동안 왕이 아닌 왕으로 무력감과 두려움 속에 살던 그였다.

제위기간 국내외 정세는 절망적이었다. ‘민족자결주의’로 아시아 식민국에 희망을 주던 미국은 한국의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을 외면했다. 1921년엔 독립군 간 총을 겨눈 ‘자유시 참변’으로 의병활동이 크게 약화됐고, 1925년엔 상해 임시정부가 이승만 퇴진을 둘러싼 갈등 끝에 사실상 와해 양상을 보였다. 희망이 없는 때, 토종 정권의 완전한 종식을 의미하는 ‘순종 사망’의 비보가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순종의 죽음은 새로운 희망의 도화선이기도 했다. 억압 상황을 체념하려는 순간, 위기감과 독립 열망을 재점화시킨 계기였던 것이다.

6월10일 순종의 장례식을 앞두고 학생들 사이에 대대적인 거리시위 모의가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이 음식점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하자마자, 일본 경찰에 자수하는 바람에 힘을 갖지 못하고 피만 흘린 7년전 3.1운동을 기억하고 있기에, 학생들이 앞장을 섰다.

세검정으로 춘계 야유회를 가던 중 황제의 서거 소식을 접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들은 ‘거사’의 뜻을 모은 뒤 5월20일 서울 충정로 박두종의 하숙집에서 각 학교 대표 40여명이 모인 가운데 세부 계획을 모의한다. 박두종과 박하균 등은 거사자금을 마련한 뒤 북아현동 숲속에 들어가 태극기 200장과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을 만들었고, 6월6일에는 사직동에 있는 이석훈의 하숙집에서 격문 인쇄에 착수해 밤샘 작업 끝에 거사당일인 10일 새벽까지 수만장을 찍어냈다. 이병립이 만든 격문 요지는 “이천만 동포여,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값은 자유. 대한독립 만세”였다.


5월24일 경복궁옆 통동(지금의 통의동) 김재문의 하숙집에서는 또 다른 모의가 벌어졌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닷새뒤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는 격문 수천장을 인쇄한 뒤 거사 당일 돈화문, 단성사 앞길 등 상여가 지날 곳에 행인을 가장해 도열했다. 통의동팀 중앙고보의 단성사 시위, 사직동팀 연희전문 학생들의 수표교 시위에 이어, 동대문, 창신동, 숭인동, 신설동까지 연쇄적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일반 시민들이 대거 합세해 서울 장안에 난리가 났다.

사회주의 계열인 노총도 거사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학생 주도 시위에 개별적으로 참가하는 선에서 그쳤다.

6.10만세운동은 쇠퇴하던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우파든 좌파든 나라의 독립을 갈구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6.10 이후의 독립운동은 통합적이고, 실용적이며,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통합, 실용적 운동의 대표적인 예는 이듬해인 1927년 좌우합작으로 만들어진 신간회 운동이었다. 독립을 위해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공감대의 유지가 필요하다고 보고 근검절약운동, 청년(독립)운동 지원 등을 활동내용으로 삼았다. 오피니언 리더 4만명의 회원들은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 앞에선 좌우구분이 있을 수 없음을 정강에 명시했다. 대규모 투옥 등으로 4년만에 문을 닫았지만, 국민들 사이에 ‘겁 없이 항거하는 마음’을 심기에 충분했다.

1929년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 남학생 후쿠다 슈조 등이 광주고보 여학생 박기옥 등을 희롱한 데 항의한 일이 발단이 돼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11월3일 항일시위를 벌인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시, ‘아무리 억눌려도 부당함을 참지 않는다’는 마음이 국민 사이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은 이념을 넘어 부산, 개성, 평양, 서울 등 전국 수십~수백개 소도시로 퍼져나갔고, 해외동포까지 가세하는 범국민 항일투쟁으로 번졌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집권연장 시나리오인 ‘호헌’ 철폐 여론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1987년 6.10 민주항쟁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뜻있는 개혁가와 종교인,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해, 군부의 항복선언을 받아낸 사건이다. 민주주의 제도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치사적으로는 1953년 체제, 유신체제에 이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1987년 체제’의 시발점이었다.

6.10은 이런 것이다. 이처럼 숭고한 6.10 기념일인데 요즘 말들이 너무 많다. 또 보혁대결이다. 6월8일 개혁진영이 서울 광화문에서 ‘제22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 추모제’를 열자, 보수단체 애국주의연대, 어버이연합은 “추모대상에 간첩이 있다”며 맞불집회를 열면서 폭력 등 불상사를 빚기도 했다. 민족화해를 조금이라도 도모하려 하면 ‘종북’이란다. 밀사를 통해 7.4 남북공동성명을 성사시킨 박정희도 종북인가.

문제는 6.10때만 되면 ‘종북 논란’을 초래한 원인제공자에게도 있다. 주사파 공부를 해 본 일부 운동권이 이적단체로 판결난 조직을 구성해 해마다 6.10때 남북한 만남을 추진하거나, 반정부 시위를 계획하는 등 툭하면 6.10을 악용했기 때문이다.

2013년에 좌우가 대체 뭔가. 할 일이 태산같고, 숭고한 6.10의 의지를 되새겨 나라발전의 정신적 지주로 삼아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좌우를 넘어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를 도모했던 1926년, 1987년만도 못한 지금이다. 우리 나라의 점진적이고 실용적인 발전을 바라는 중도(中道)는 6월10일 좌우의 극한 준동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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