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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세일즈맨의 죽음’은 무대에서 왜 반복되나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

시인 마종기의 시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의 한토막이다. 최근 서울과 강원 원주 공연을 마치고 경기 하남으로 무대를 옮긴 연극 ‘아버지’에서 시는 주제를 명징하고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국물을 다 낸 뒤에 버려지는 멸치를 보며 한 때 남해 물살을 싱싱하게 가르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멸치를 생각하자는 시인의 마음이 극에선 ‘아버지’로 대상을 바꿔 투영된다. 이 아버지 ‘장재민’은 한 때 은색 그렌저를 타고 대구, 부산, 전주, 광주 등 팔도를 누비며 사무용품 가구를 팔던, “정말 대단했던” 영업부장이다. 하지만 늙어빠진 지금은 젊은 오너로부터 괄시받는 대상이다. 장재민을 연기하는 배우 이순재, 전무송은 울분을 터트린다. “34년 동안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오렌지 과육만 빼먹고 껍질을 버렸다”며 허탈해한다. 장재민은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도벽을 지니고 있는 무직자 아들을 위해 생명보험금을 탈 요량으로 자살을 감행한다. 연극 종반부로 가면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거리고, 막이 내려오면 오열하는 관객도 있다.

연극 원작은 미국 희곡작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1930년대 대공항, 한국전쟁을 치른 뒤 1949년 미국 시민의 생활상을 배경으로 사회의 부조리 속에 무너져내리는 인간성을 그린 작품이다. 1985년 더스틴 호프만 주연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브로드웨이에서 700회가 넘게 공연됐으며 국내서도 여러차례 연극 무대에 올려졌다. ‘아버지’에선 좀 더 한국적 사실주의가 묻어나지만, ‘자본주의 꽃’으로 불리는 세일즈맨이 몰락해가는 과정의 뼈대는 같다.

1940년대 미국의 이야기가 70년 세월을 거슬러 2013년 한국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 1930년대 세계 대공항 사태가 재현될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 극단적 사태는 피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신자유주의 이후의 불황, 대량 해고와 실업, 빈부격차 등 세계화 폐해의 어두운 터널의 한가운데 놓여있다. 급증한 자살, 높은 청년 실업률, 과도한 부채, 세대 갈등 등의 코드가 1949년 ‘세일즈맨의 죽음’과 2013년 ‘아버지’에 모두 녹아있다.

젊은 시절 84세의 전설적인 외판원을 본 뒤 영업맨으로서 성공을 꿈 꾼 한 남자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 비극은 자본주의에 눌리고, 사회 시스템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어느 국가나 시대에 있는 절대 다수의 ‘을(乙)’,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한지숙 기자/js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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