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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내가 누군데…” 완장에 취한 권력층의 일그러진 性의식
“권력을 가진 자들의 스트레스
성욕이나 식욕으로 풀수 밖에”
삐뚤어진 권력·지배욕의 자화상

尹파문이후 정·관계 ‘여성 트라우마’
금주령 등 사고예방 미봉책에 그쳐
근본적 의식개혁·교육은 아직 먼 길




“권력을 가진 사람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압박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다. 이것은 성욕이나 식욕으로 풀 수밖에 없다. 클린턴과 르윈스키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미국 순방 중 ‘성희롱 의혹’ 사건으로 정국을 시끄럽게 했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사건 당일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날 밤 술자리에서 인턴 A 씨의 엉덩이를 쥐어잡는(grab) 파문의 전초 격인 말이다.

그냥 한 남자의 농담처럼 흘려버릴 수도 있는 이 말엔 ‘비뚤어진 권력욕’에 대한 자화상이 모두 묻어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섹스는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여겨졌다. 모계사회 이후 인간의 역사가 주로 남성권력의 독점이었고, 권력의 상징은 얼마나 더 많은 돈을 갖고 있고, 얼마나 더 많은 여자를 거느리느냐로 판가름 났다. “모든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말이 통용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문제는 ‘부(富)’와 ‘검은돈’이 등가의 성질이 될 수 없듯, 섹스 역시 성희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주제라는 데 있다. 흔히들 얘기하는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은 도덕적 문제에 집중되지만, 성희롱은 도덕적 문제뿐 아니라 범죄에 해당된다. 정치인이 검은돈을 받으면 철창 신세를 져야 하는 이치와 똑같다는 얘기다.

▶비뚤어진 권력=전문가들과 정치권에선 이번 윤 씨의 성희롱 파문 밑바닥에는 비뚤어진 권력욕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권력은 돈을 부르고 성(性)을 부르곤 한다. 특히 권력이라는 게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때엔 돈과 여자에 대한 자제심이 무너지기 십상이다. ‘내가 누군데…’라는 기저심리가 인간의 판단을 가로막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정치심리학적으로 윤 씨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윤 씨는 대선 이전까지만 해도 꼴통보수(?) 논객으로 극우 인사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이름이 알려졌을 뿐이다. 그리고 한 정부의 ‘입’인 대변인으로는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올해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에서 청와대 대변인으로 말을 갈아탈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마 윤 씨는 아니겠지. 그게 말이 되나…”라며 혀를 찼다.

하지만 윤 씨는 박근혜정부 첫 대변인이 됐다. 그리고 윤 씨는 브리핑 때마다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입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박근혜정부 1호 대변인이라는 타이틀을 특별한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다녔다. 그는 사석에서 “내가 박근혜정부의 첫 대변인이 된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가문의 영광이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에게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권력은 달콤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하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권력을 그는 제어하지 못했다. 청와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뛸 당시엔 잘 몰랐을 권력을 그는 이역만리 땅에서 실감했다. 공군 1호기를 타고 미국땅에 내려 별다른 세관과 보안 검색도 거치지 않은 채 모터케이드(motorcade)를 통해 미끄러지듯 공항을 빠져나갈 때 그는 무한한 희열을 느꼈다, 자신이 가진 권력에 대해.

▶권력욕에 에스컬레이트된 잘못된 성의식=그는 이 무한한 희열을 즐기듯 미국 순방 사흘 내내 인턴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인턴들에게 윤 씨는 최고의 권력자였을 것이다. 그가 술에 취해 거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게 종종 목격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특히 윤 씨는 권력이라는 ‘완장’이 비뚤어진 성의식과 결합됐을 때 얼마나 큰 참사가 빚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제어되지 않은 권력과 ‘내가 곧 법인데’ 하는 환각제로 윤 씨는 인턴에게 “너와 나는 잘 어울린다” “나는 변태다”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성희롱 파문 이후 국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인턴을 “가이드”로 깎아내린 것도 비뚤어진 권력이 만들어낸 슬픈 현실이다.

유용화 정치평론가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권력욕을 가진 이들이 일종의 지배욕도 강하다는 분석이 있는데, 정치인이나 권력자들도 그런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 이전에 성추행, 성희롱에 대한 개념이나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탓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오죽하면 여당 의원이 나서서 청와대에서 성교육을 하자는 얘기가 나오겠냐”며 “기본적으로 인권보호 인식이 취약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불똥은 튀었는데… 근본적인 대책은 ‘NO’=윤 씨 파문 이후 정치권과 관가(官街)엔 술과 여자 트라우마가 생겼다. 지난 20일 개막한 제2차 아시아ㆍ태평양 물 정상회의 참석차 태국을 방문한 정홍원 총리 주변에선 여성 인턴을 찾아볼 수 없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행사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정이 강행군이라 남성이 많이 뽑힌 것이지 일부러 여성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하지만, 관가에선 윤 씨 사건의 영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여성보다는 남성 지원자에 무게를 두고 인턴을 선발했다는 얘기다.

또 혹여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술’도 없어졌다.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는 술을 멀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몸사리기는 미봉책에 그치고 만다고 지적한다. 권력자의 성희롱 사건이 이번 윤 씨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똥이 튀었으니 일단은 내 몸만 건사하자는 인식으로는 언제든 제2, 제3의 윤창중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이화영 한국 여성의 전화 성폭력상담소장은 “공직사회는 위계 관계가 강해서 성폭력 피해를 경험해도 이를 공론화하기 힘들다”며 “전체 직원 몇백 명이 강당에 모여서 듣는 성희롱 예방교육으로는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좀 더 많은 권력을 갖는 고위공무원단 공직자의 경우 좀 더 철저하고 심도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좀 다른 진단을 내놓는다. 신 교수는 “이는 청와대 시스템의 문제로 봐야 한다”며 “대통령만 쳐다보는 상황에서 위계질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비롯된 문제”라고 진단했다. 신 교수는 그러면서 “박 대통령을 따르는 이들이지만 조직은 모래알과 같다”며 “이번 기회에 시스템을 신뢰하고 집단이성에 따르는 인사 검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석희ㆍ백웅기ㆍ원호연 기자/hanimom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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