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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대위의 구도자, 전무송
일흔에 연극인생 클라이막스 꿈꾸는 51년차 영원한 배우…그의 삶 그리고 예술관…
녹슨 쇳조각 깎다가 아, 내 인생 이렇게 녹슬고 있구나…우연히 접한 연극에 감동받고 배우의 길로

등록금 대신 내주고 숙식 제공해주고… 이들 조력자 없었다면 배우의 삶은 없었을지도… 내가 머리는 나빠도 가슴은 나쁘지 않거든

난 관객에 연민 일으키는 이미지. 주로 안쓰러운 듯한 회색빛 배역 맡아…영화 ‘만다라’는 나를 연기에 눈뜨게 해준 작품

인생이 5막이라면 남은 1막…내 인생 대단원 나도 모르지, 내 연기는 아직도 몽우리 상태




4월의 정동길을 걷는다. 황토색 면바지에 비슷한 톤의 체크셔츠, 담갈색 체크 정장 윗도리를 걸친 배우는 목에 검은색 스카프까지 둘렀다. 스타일의 화룡점정인 진한 갈색 수제화는 딸이 외국에서 사온 선물이란다. 멋스럽게 차려입은 배우 전무송(72)과 나란히 걷는 정동길은 봄꽃이 채 피기도 전에 계절을 다시 거슬러올라가 늦가을 풍경으로 물든다.

“여기 세실다방이 없어졌네. 연습 중간에 나와서 대본을 읽곤 했었는데….” 덕수궁 돌담을 마주한 성공회 옆 세실극장 지하 세실다방은 1970~80년대 연극인, 문인, 언론인이 즐겨찾던 문화 명소였다. 지금은 한식당으로 바뀌어 옛 정취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요즘 커피숍은 시끄럽고 어지러워서…”란 푸념조가 곁들여졌다.

적당히 앉아 얘기를 나눌 곳을 찾던 길은 대로변으로 나와 서울특별시의회 의사당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연극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할 때가 눈에 선하네요. 그때 관객 줄이 건물 밖으로 길게 죽 늘어서 있었어요.”

지금의 서울특별시의회 의사당은 한때 국립극장으로 자리했다. 문화예술에 목말라하던 수많은 청춘이 이곳에 발도장을 찍었을 터다. 연기를 시작한 지 50년이 넘은 노배우와 지나는 자리마다 현재와 과거의 모습이 중첩됐다.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인간이 되어라.’‘인간이 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할 지 생각하라.’ 스승 유치진이 던진 이 과제에 전무송은 51년째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 그에게 배우의 길은 구도자의 길과 같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시간은 더 거꾸로 갔다. 남산 자락 끄트머리에 있는 남산예술센터의 1960년대를 추억했다. 한국 연극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동랑 유치진은 남산드라마센터를 운영하며 부설 연극아카데미를 만들었고 이것이 훗날 서울예술대학교로 발전했다. 전무송은 이 아카데미 1기생이다. 1962년 입학한 1기생 70명 가운데 20명가량이 졸업했고, 이 가운데 현재 무대에서 활동하는 이는 전무송을 비롯해 신구 민지환 반효정과 봉산탈춤 예능보유자 김기수 정도가 손꼽힌다.



▶연극배우, 1막1장=전무송은 연극인생 1막을 열기까지 길 위에서 만난 여러 소중한 인연을 강조했다. 우연한 조력자가 없었다면 어쩌면 그에게 배우로서의 삶은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인천에서 7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시절 장남은 가계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자리다. 장래희망란에 흔히 ‘딴따라’로 치부되던 배우를 쓸 일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명문 인천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예회 사회를 보고, 야구선수로도 뛰는 등 예체능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기계공고로 진학했다. 어떻게든 취직해서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전교에서 두 명만 학교장 추천을 받았는데, 그 중 한 명으로 뽑혀 인천기계공작청에 견습생으로 들어간 거예요. 거기서 선반에 쇠를 놓고 깎는데, 떨어진 쇳조각이 녹이 슬었더란 말이죠. ‘아! 내가 이 깎인 쇠처럼 녹슬고 있구나’란 생각에 그 길로 뛰쳐나왔죠.”

첫 번째 인연은 방황하다 들어간 신문사 동인천지사였다. 신문 수금사원으로 일한 그는 그 일도 성에 차지 않아 밤만 되면 서라벌예대에 다니던 동창을 만나 술을 마시고 연극작품을 올릴 것을 모의했다.

“어느날 술값으로 시계를 풀어주고, 다음날 지사장에게 가불해달라 했죠. 그 분이 ‘그런 쪽에 마음이 있어?’라며 드라마센터 개관 기념 연극 ‘햄릿’표 2장을 주더라고. 가슴이 울렁울렁했지.”

정식 연극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침 연극아카데미생 모집공고를 봤고, 1기생으로 입학해 2년간 연기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인연은 지금도 행방이 묘연한 여성이다. 비싼 등록금을 간신히 대오던 그는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구하지 못하고 쉬고 있었다.

“학교에서 등교하라고 연락이 온 거예요. 미8군에서 노래했던 경상도 분인데, 등록금을 대신 내줬더라고. 훗날 KBS의 사람 찾아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알아보고, 미국에서 공연할 때는 교포신문에 광고도 냈는데 못 찾았어요.”

그는 한때 영화배우인 고 김진규 집에서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전무송은 “주변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온 거다. 내가 머리는 나쁘지만 가슴은 나쁜 거 같지 않다”고 했다.



▶스승 유치진=“유치진 선생에게 욕 많이 먹었죠.”

극작가 유치진은 전무송에게 연기 스승이자 인생의 스승이다. 아카데미 1학년 때 유치진 창작극 ‘소’를 올릴 때다. 농촌을 배경으로 소를 팔아 교육을 받고 신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계몽주의와 소를 지켜야 하는 민족주의가 갈등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개똥이’를 하고 싶었는데, 안 시켜주는 거야. 조연으로 이웃집 영식이가 술취해 행패부리는 연기를 하는데 선생이 크게 혼내더라고. ‘그게 깡패지, 술취한 거냐? 넌 배우되기 틀렸으니 집에 내려가!’라고. 그날 서울역광장에서 술마시고 진눈깨비가 내리는 허공에 대고 소리를 막 질렀지. 두고봐라!”

꾸짖음을 듣고선 ‘아무거나 다하겠다’고 태도를 싹 바꿨다. 1년 뒤 졸업공연 ‘춘향전’에서 이도령 역이 그에게 주어졌다. 뒤늦게 스승이 자극을 주고자 혼냈음을 깨달았다.

“춘향전이 끝났을 때 선생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배우가 무대에 제대로 서려면 10년은 배워야 한다’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라’ ‘인간이 되려면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라’고.”

졸업할 때는 ‘민들레 씨앗이 되어 우리나라 연극을 부흥시키는 게 너희의 숙제’란 말도 새겨들었다.

“그분이 ‘너는 배우로서 지녀야 할 중요한 장점이 있어. 넌 연민을 갖고 있어. 관객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하라’는 말씀도 하셨죠.”

▶클라이맥스, ‘만다라’=타인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전무송은 연극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내레이션까지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만의 고유한 색깔을 드러냈다. 좀더 대중적인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어진 배역은 교수, 화가, 박사, 신부 등 주로 고뇌하는 지식인이나 예술인, 구도자였다. 부유한 권력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닌 게 아니라 약간 안쓰러운 듯한 회색빛 인상을 배역에 입히곤 했다. 그는 매해 연극이나 영화를 1편씩 꾸준히 출연해 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만다라’를 꼽았다. 승적도 없는 땡추중 ‘지산스님’의 절망감과 자족적 삶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그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및 남우조연상,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등을 휩쓸고 배우 전무송이란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됐다.

“ ‘만다라’를 하면서 연기에 눈을 뜨게 된 거죠. 그 전엔 욕심으로 연기를 한 거라면, ‘지산스님’부터는 배역을 연구하기 시작했죠.”

그즈음 연출부에선 지산의 모델이 될 만한 스님을 추천했다. 그 스님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을 하루 앞두고 전무송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내가 지산스님이 되어 바라를 지고 산을 오르는데, 순간 드라마센터에 들어서 있고, 연기 연습할 때 들고 다니던 비닐 가방에는 라면, 여섯 개짜리 담배가 들어있는 거예요. 순간 벌떡 깼죠. 배우가 되겠다고 드라마센터에 드나든 게 10년 세월이야. 지산이 깨닫겠다고 만행을 하는 게 그거와 그게 뭐가 달라. 그래서 그 스님을 안 만난다고 했죠.”

그는 이렇게 해서 김성종 원작소설 ‘만다라’의 지산을 자신만의 것으로 재창조했다.



▶‘아버지’ 전무송=지난해 전무송의 연극배우 데뷔 50년을 기념한 ‘보물’은 연극계에서 화제였다. 무엇보다 딸, 사위,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헌정한 무대여서 관객에게 전하는 감동이 남달랐다. 전무송의 가족은 연극인 가족으로도 유명하다. 딸 전현아(42), 아들 전현우(38), 사위 김진만(44)이 모두 배우다. ‘보물’은 딸이 극본을 쓰고, 사위가 연출했고,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서 연기를 했다.

“환갑이나 생일잔치 이런 거를 안 챙기는 성격인데, 후배가 칠순 기념 공연을 하자고 했을 때도 못하게 했었요. 나보다 선배가 계시는데 탐탁지 않았죠. 마침 딸이 극작도 하고 있어서 가족이 일반공연하듯 올리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한 거죠.”

배고픈 직업인 연극배우를 자녀에게 물려주고, 배우 사위까지 받아들인 전무송은 어떤 아버지일까. 이 물음에 “무능력한 아버지”라는 답이 곧장 튀어나온다. 딸, 아들이 연기자를 지망할 때 처음엔 반대했다. 하지만 딸이 ‘아버지도 집안 반대에도 연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을 땐 할 말이 없어져 ‘스타가 되고 싶어서라면 재고하고, 정말 연기가 좋아서라면 시작하고 제대로 하라’고 승락했다. 딸이 배우 사위를 데려왔을 때도 처음엔 반대했지만 딸의 장문의 편지를 받아본 뒤 고집을 꺾었다. 그는 한없이 너그러운 아버지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기 의사나 입장을 많이 물어봐줬죠. 들판에도 데리고 다니고, 낚싯터에도 데리고 가고. 왜냐, 내가 저녁에나 연습하러 가고 낮에는 집에 있었으니까. 하루는 낮에 벽에다 아이들의 크레파스로 공룡과 나무를 그려놨지. 그랬더너 얘들이 너무 좋아서 학교까지 가서 자랑을 했어요. 마누라는 담임선생에게 그 얘길 전해듣고 창피해하고.”



▶‘구도자’ 전무송=인생 3분의 2를 무대에서 보낸 전무송은 무대에 오르지 않을 때는 “그냥 멍하니 있는 것”으로 시간을 때운다. “반야심경 필사를 몇 년째 하고 있는데 지금도 글자를 자꾸 틀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땐 내가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증거지.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늘 틀려.”

‘만다라’에 출연한 뒤로 알게 된 지관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은 전무송이 찾아올 때면 “우리 절 스님보다 더 스님 같다. 우리 절 원효대사님 오셨다”고 농담을 한다.

51년차 배우에겐 진짜 현실의 삶과 무대에서의 삶의 경계가 모호하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기까지 내 영역이 모두 무대죠. 의식적으로 행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무대죠. 관객 앞에서 의식적으로 뭔가 만들면 그때는 배우 전무송이 되는 거죠. 그 공간에선 내가 쌓인 걸 터뜨리고 정화돼 나오죠. 관객은 배우의 거짓말을 인정하고, 자기도 무대를 보며 목욕을 하고 나오는 거죠.”

그는 인생이란 무대에서 지금 몇 막 몇 장쯤을 연기하고 있을까.

그는 “인생 전체를 5막이라고 치면 1막 정도 남은 거 같다”고 했다.

“대단원은 어떤 것인지 나도 모르겠어. 돈을 목표로 했다면 수치로 알 수 있을텐데. 연극은 그게 아니죠. 훌륭한 배우의 클라이맥스는 뭘까를 아직도 고민한단 말이죠. 그 숙제를 아직도 푸는 중이야. 마지막을 만들고 싶다는 지금 심정은 젊을 때 주인공을 맡고 싶었던 욕심과는 달라요. 아직 내 연기는 피어난 게 아니라 봉오리진 상태예요. 그게 이뤄진다면 편히 쉴 수 있을 거 같아.”

그에게 연기란 생애를 통틀어 풀어나가야 할 구도의 길과 다름없어 보였다.

한지숙 기자/jshan@heraldcorp.com




전무송이 걸어온 길
경기 인천공업고등학교, 서울연극학교를 졸업한 뒤 1964년 ‘춘향전’의 이몽룡 역으로 정식 데뷔했다. 이후 연극 ‘하멸태자’ ‘세일즈맨의 죽음’ ‘고도를 기다리며’ ‘생일파티’, 영화 ‘만다라’ ‘길소뜸’ ‘아부지’ ‘연산군’ ‘아다다’ ‘동승’, 드라마 ‘원효대사’ ‘왕룽일가’ ‘왕과 비’ 등 수십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연극, 스크린, 브라운관을 누볐다. ‘하멸태자’로 1977년 연극 사상 첫 유럽 순회공연을 가졌다.

제1회 연극비평가상 연기상(1978년),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남우조연상(1981년), 대한민국연극제 남자연기상(1982년), 백상예술대상 연기상(1986년), 이해랑연극상(2005년) 등을 받았다. 국립극단 단원을 지냈고, 경기도립극단에서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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