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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계백의 그곳① 고향마을㉯--“여기가 내 고향…계백의 표시
 (‘계백의 그곳① 고향마을㉮’에서 계속)

[헤럴드경제=부여]충화면은 부여읍과 서천읍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곳으로 백제시대부터 충신이 많이 배출됐던 고장이다. 백제시대에 계백, 성충, 흥수, 혜오화상, 억례복류, 곡나진수, 복신, 도침 등 무려 8명의 충신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팔충(八忠)으로 불렸다. 백제시대 땐 가림군(加林郡)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임천군(林川郡) 팔충면(八忠面)이 됐다. 현재의 충화면은 1914년 팔충면과 가화면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이다. 유성복 부면장님도 이 동네 사람들은 예로부터 의리가 강하고 충절이 높았다고 말했다.

마을의 충절 전통은 일제시대에도 그 기상을 발휘했다. 유 면장께서는 3.1운동 때 인근 임천에서는 3월6일에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주축이 모두 충화면민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3월6일 충화면에서 별도로 발원제를 지낸다고 했다. 

계백 장군의 동상. 왼쪽은 논산시 백제군사박물관에, 오른쪽은 부여군청 앞에 있는 동상이다.

계백 장군은 어린시절 표뜸마을과 인근의 팔충리에서 무예를 수련했다고 한다. 계백은 홀어머니가 특히 강하게 키웠는데 백충재에서 천등산으로 활을 쏜 후 말을 타고 달려 화살보다 먼저 산 정상 과녁에 도착할 때까지 무술을 익히도록 했다. 그런 후에야 조정에 나갈 것을 주문했다. 숱한 날 달렸지만 말이 먼저 도착할 수 없었다.

하루는 계백이 말을 달리려는 순간 큰 호랑이가 나타나 말을 물어 죽이고 계백을 등에 태워 과녁으로 달렸는데 도착 직후에 화살이 날아왔다. 이 호랑이가 바로 비호(飛虎)로, 논산군지에 이 같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술이 경지에 오른 계백은 호랑이와 함께 천등산 정상에서 밤에는 석등에 불을 밝히고 글을 읽었다. 저멀리 부소산 왕궁에서 의자왕이 서쪽 하늘 아래서 반짝이는 이 불빛을 보고 신하를 시켜 알아보게 한 결과, 계백이라는 청년의 이야기를 듣게 됐고 그 후 조정의 무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계백의 고향마을 표뜸 바로 앞에 있는 천등산. 무예를 닦던 산이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따라 계백이 조정에 나가기 전까지 자신을 연마했던 마을 앞산 천등산으로 올랐다. 해발 200m의 야트막한 동네산이지만 걸어서 오르기에는 꽤나 가팔라 숨이 찼다. 마을에서 빠른 남자 걸음으로 정상까지는 약 20여분. 정상 바로 못 미친 곳에 소위 ‘계백약수’라는 우물이 있었다.

계백약수는 원래 수많은 충신들이 넘나들며 마신 우물이라 해서 ‘백충대(百忠臺) 우물’로 불렸으나 계백 장군의 이미지를 직접 부각시키기 위해 유 면장께서 보수하면서 계백약수라고 짓고 백충대 약수라는 작은 문구도 함께 남겨뒀다. 물론 이 이름도 쉽게 지은게 아니다. 지역 유림 어르신들과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계백 장군이 고향을 떠나갈 때 이 우물 물을 마셨다는 표시를 남기기 위해 우물 안에 돌을 넣어뒀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필자가 가보니 우물 안은 깨끗했고 우물 위에 넙적한 돌이 덮개 처럼 올려져 있었다. 이 우물 돌에 대해 면장님은 재밌게 설명했는데, 필자가 ‘왜 우물 안에 안 넣고 그 큰 돌을 덮개로 해뒀냐’고 하자 “장군이 쩨쩨하고 주먹만한 돌을 넣었겠냐”며 “그리고 꼭 안에 넣었다고 볼 수도 없지 않느냐”하시며 우물에 낙엽도 날아들고 해서 덮개용으로 올려 그 상징성을 부여했다고 했다. 그 돌은 이 산에서 구했고 워낙 크고 무거워 포크레인으로 들어 올렸다고 했다.

계백약수. 천등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이 우물은 마르지 않는 샘으로 계백 장군이 고향을 떠나갈 때 자신이 마시던 우물임을 알리기 위해 돌을 넣어뒀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유 면장께서 이 우물을 잘 정비하셨는데 앞으로 더 연구해서 보완할 계획이라고 했다. 잔설이 덮인 찬바람 속에서 마신 그 우물 물은 의외로 맛이 좋았다. 이 우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계백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며 마시던 우물, 1400년이 지난 지금 필자도 마셨다.

이 우물에는 계백 장군과 관련된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장군의 어머니가 유복자인 계백을 출산할 때 난산으로 실신하자 호랑이가 이곳 우물 근처 석실로 물고 와 젖을 먹여 키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계백과 호랑이는 이래저래 인연을 맺고 있다.

여기서 100여m만 더 오르면 정상인데 계백이 호랑이와 함께 앉아 책을 읽었다는 그 정상이다. 산 이름도 ‘하늘 아래 등불’, 천등산(天燈山)으로 불려오고 있다. 실제 이 산 정상에서도 부소산과 부여읍내가 아련히 보였다. 서남쪽으로는 장항제련소까지도 보이는 곳이다. 계백이 앉아 책 읽었을 자리는 지금은 백제문화제 행사 때 횃불을 채화하는 천단(天壇ㆍ채화단)이 설치돼 있다.

천등산 정상. 지금은 천단이 설치돼 있다.

계백은 후에 백제 제2의 관등인 달솔(達率)까지 올랐는데 명문가문 출신과 달리 일반민으로 보이는 계백으로서는 온전히 자신의 노력 하나로 출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계백에 관해 전해지는 사료가 거의 없어 주민들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와 당시 시대상황에 비춰 연구해온 학자들의 자료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밖에 없었다.

계백 장군에 대한 얘기를 끊임없이 이어가던 유 면장께서는 이웃 논산에 빼앗기다시피한 계백 장군의 이미지를 부여로 되찾아 와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나서 자란 곳이 부여이고 전사한 곳이 논산인데 마치 계백이 논산 사람으로 비쳐지는게 못마땅하다는 것. 이는 부여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서라고 했다.

필자는 면장님과 대화 중 고향마을에 계백 장군에 관한 스토리와 시설물들이 너무 없어 뭔가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면장님도 바로 이 부분에 안타까워 하셨다. 이제 이곳 충화 주민들은 계백 장군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행사가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 

천등산 정상에서 바라 본 부여. 멀리 지평선 가운데 부분 산이 부소산이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마을에서는 앞으로 군의 협조를 받아 계백 장군의 얼을 이어받을 무예촌을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무예촌을 건설한 후 천등산과 팔충사 등을 잇는 관광지로 개발해 전국민들에게 계백 장군의 기상과 얼을 되새길 기회를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 면장님은 계백 장군의 처소 등을 갖춰 하다못해 전국의 학생들과 사관생도들이 와서 호연지기 기상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해도 좋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도 내놓았다. 늦었지만 이제 조금씩 뜻을 펴 가고 있었다.

부여읍내에서의 계백의 흔적은 부소산의 삼충사에 성충, 흥수와 함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계백의 고향마을로 알려진 충화면, 이렇다 할 역사적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치가 아름다운 관광지도 아닌 이 황량한 시골마을을 왜 찾아왔을까. 여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볼거리도 즐길거리도 전혀없는 한적한 시골마을일 뿐이지만 풍전등화 앞에서 국은에 보답하자며 병사들을 이끌고 목숨을 바친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사람, 역사는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국가에 충성을 다 한 위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껴봤다는 것만으로도 필자에게는 힐링투어가 됐다.

다만, 자자손손 전할 내실있는 역사교육의 장을 마련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계백의 그 곳② 황산벌’로 이어집니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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