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바로 법무법인 한우리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찬종(74ㆍ사진) 변호사다. 그의 별명은 ‘독불장군’ ‘무균질’ 등 여러가지다. 모두 정계에 몸담으며 생긴 별명이다. 그는 한때 대권을 꿈꾸던 야심가였다. 하지만 박 변호사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권변호사로 귀환(?)했다.
“주민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분통이 안 터지겠습니까?”
서부이촌동 주민의 손해배상 소송을 맡게 된 취지를 묻는 기자에게 돌아온 박 변호사의 첫 대답은 이랬다. 그는 지난 3월 중순 용산 개발사업을 주도하던 드림허브의 디폴트 소식을 접한 직후 서부이촌동 주민을 위해 수임료 한 푼 받지 않고 법률구조 방식으로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부이촌동을 도시개발법으로 묶어 6년간 재산권 행사를 막아온 서울시와 보상을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은 드림허브 때문에 이번 사태가 초래됐다”며 “소송은 서울시와 드림허브에 연대책임을 묻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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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는 “주민이 구제받을 부분은 미지급된 보상비를 비롯해 6년간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한 피해액과 보상계획을 믿고 주민등록조차 이전하지 못했던 주민의 불편을 고려한 위자료 등”이라며 “최소 2000억원에 달하는 대형 소송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그는 한국 인권변호계의 산증인이다. 정치에 몸담기 전부터 정치적ㆍ사회적 약자를 위한 변호활동을 40년 넘게 지속해왔다. 박 변호사는 1970년 12월 개업해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가 서슬퍼렇던 1974년 현대조선소 파업사건의 무료 변론을 시작으로, 80년대 굵직한 시국사건의 변호인 자리를 지켰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학생 20명이 구속됐던 미 문화원 사건(1985년)의 변론단장을 맡은 것도 그였다. 2007년 정계를 떠났던 그가 변호사로 복귀한 것을 두고 인권변호계가 ‘박의 귀환’이라 평가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의 무료 변론은 이뿐이 아니다. 판사를 향해 석궁을 날린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 미네르바 박대성,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등 그는 연달아 무료 변론에 나섰다.
무료 변론으로 처리한 사건이 몇 건이나 되는지를 묻자 박 변호사는 “무료로 맡은 사건이 너무 많아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약자를 위한 그의 변론은 소통에서 시작된다. 매일 아침 트위터를 통해 그와 소통하는 팔로워가 무려 11만명에 달한다. 박 변호사는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서민의 무료 변론을 위해 인천에 가야 한다”며 오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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