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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채무버티기 급증, 도덕적해이 현실로
빚을 갚지 않는 채무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살림살이가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새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마련하고 국민행복기금이 출범하면 탕감받을 수 있다는 기대 심리가 작용한 탓이다. ‘버티면 정부가 갚아준다’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것이란 당초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금융업계 등에 따르면 금융권 집단대출의 경우 연체율은 최근 1년 사이에 두 배가량 늘어난 2.0%로 나타났다. 이는 통계 집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집단대출은 아파트 분양자들이 건설사에 줘야 하는 중도금과 이주비 등을 금융기관에서 단체로 빌린 돈이다. 그런데 대출금을 갚으면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나오더라도 혜택을 볼 수 없어 손해라는 생각에 상환을 가능한 한 미루는 것이다. 정부는 부동산 대책을 내놓더라도 대출금 감면은 없을 것이라고 해도 믿지 않는 분위기다.

일반 대출자나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 사이에서도 같은 심리가 확인되고 있다. 3개월 이상 채무불이행자 124만명 가운데 90% 이상이 6개월 이상 한 푼도 돈을 갚지 않았다. 신용회복위원회가 신용불량자의 채무 장기 분할 상환을 유도하는 프로그램에 4명 중 1명이 중도에 포기하는 등 탈락률이 최근 부쩍 늘었다. 새 정부가 구제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아예 상환을 포기한 때문이다.

빚의 늪에 빠져 희망조차 품지 못하는 이들에게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행복기금의 명분은 충분하다. 부동산 대책도 시급하다. 하지만 이게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다면 되레 시장경제의 원칙을 훼손하는 독이 된다. 빠듯한 살림을 쪼개 빚을 갚는 성실 상환자들의 박탈감도 문제다. 물론 정부도 이런 부작용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신제윤 금융위원장 내정자도 “엄격한 심사를 통해 지원 대상자를 한정하고 사후 관리에도 만전을 기하겠다”고 했다. 꼼꼼한 관리 대책을 세우겠지만 헛된 기대감을 일깨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가계빚이 국내총생산(GDP)의 90%에 육박하는 1000조원 규모로 우리 경제의 시한폭탄이 됐다. 국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탕감은 없다는 확고한 원칙은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 대신 갚아주는 게 아니라 줄여나갈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게 정부 역할이다. 당장의 수익에 눈이 어두워 무분별하게 대출을 해준 금융권에도 책임이 있다. 수익은 금융권이 올리고 악성 채권은 정부가 떠안는다면 이는 또 다른 도덕적 해이 논란만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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