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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준 희망가족 여행기 <43> 랍스터 냄새가 진동하는 혁명의 요람...미국 보스턴

[보스턴=이해준 문화부장] 세계 최고 명문 대학인 하버드와 MIT대가 자리 잡은 아이비리그의 중심, ‘미국의 아테네’, 대서양 연안의 전원적인 항구도시, 미국 혁명의 발상지…. 보스턴을 설명하는 말들은 많다. 이 가운데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여행할 것인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스턴이 필라델피아와 함께 초기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든 요람이라는 점에 관심이 갔다. 230여년밖에 안 된 ‘신생국’이자 ‘이민자의 나라’임에도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시원을 보스턴에서 찾을 수 있었다.

▶‘차 사건’ 자리엔 로브스터 냄새만=보스턴을 돌아보는 방법은 어쩌면 간단하다. 붉은 선으로 표시된 ‘자유의 길’, 즉 ‘프리덤트레일(Freedom Trail)’만 따라가면 된다. 도심에서 외곽까지 2.5마일(4㎞)에 이르는 길로, 16개의 주요 역사 현장을 연결하고 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도 있다. 첫째는 붉은 선이 뚜렷이 그어져 있지만 길을 잃기가 쉽다는 점이다. 선을 따라가다 옆의 흥미로운 건물에 눈길을 빼앗기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둘째는 여기에 표시된 곳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티파티(Boston TeaParty)’라고 불리는 역사적인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진 항구와 시민들의 토론장이었던 ‘자유의 나무’ 자리는 빠져 있다. 여기는 별도로 찾아가야 한다.

필자도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자유의 길’을 따라 걸었지만 여러 번 길을 잃었다. 첫 번째는 옛 매사추세츠 주청사를 지나다 고풍스러운 영국식 주택들에 정신을 빼앗겨 발길이 그만 찰스 강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한적한 찰스 강변의 운치에 흠뻑 빠질 수 있었지만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또다시 도심에서 붉은 선을 잃고 항구 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이건 행운이었다. 바로 그 ‘차 사건’이 벌어진 항구를 먼저 둘러보고 싶었는데, 사람들 무리에 섞여 움직이다 보니 그곳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보스턴 항구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새뮤얼 애덤스의 동상과 퍼네일홀. 미국 혁명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진 항구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항구 입구엔 1770년대에 설립된 급진적 조직인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을 만들고 ‘차 사건’과 이후 독립투쟁을 이끈 새뮤얼 애덤스의 동상이 서 있었으며, 그 뒤로 당시 시장 겸 회합장소였던 퍼네일홀(Faneuil Hall)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유의 요람’이라고도 불리는 퍼네일홀에는 프리덤트레일과 차 사건을 상세히 설명한 전시관이 있어, 당시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했다.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12월 차에 대한 영국의 과도한 세금과 동인도회사의 무역 독점에 항의해 보스턴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박의 차 342상자를 부수고 이를 바다에 내던진 사건이다. 이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를 향한 투쟁, 이른바 ‘미국 혁명(American Revolution)’의 도화선이 됐으며, 식민지 주민들을 ‘미국(America)’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시키는 계기가 됐다.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미국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을 유럽 ‘어머니 국가’의 국민이라고 생각했고, 영국 이민자와 그 후예들은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티파티’와 영국의 보스턴 봉쇄, 렉싱턴전투 등을 거치면서 자신이 영국 국민, 즉 콜로니스트(colonist)가 아니라 미국 국민이라는 새로운 자각이 생긴 것이다.

퍼네일홀 옆의 퀸시마켓과 사우스마켓은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 항구로 이어지는 길에는 보스턴의 명물 랍스터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이 즐비했고, 저녁때라 그런지 사람들이 넘쳐흘렀다. 풍성한 몸매의 미국인들이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미국 혁명의 발자취를 더듬던 이방인 여행자의 눈에 좀 낯설게 다가왔다. 보스턴 항구는 바로 그 과거와 현재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장소였다.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진 항구로 이어지는 길에 로브스터와 게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고, 이를 즐기는 시민들로 거리가 붐빈다.

▶미국 건국의 요람 ‘프리덤트레일’=이틀째 날. 어제 살짝 맛봤던 ‘자유의 길’을 처음부터 제대로 돌아보기로 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 때문에 오전엔 숙소에서 빈둥거리다 오후에 날씨가 개자 상큼한 기분으로 본격적인 탐방에 들어갔다. 프리덤트레일 탐방은 미국 혁명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곳이기도 했지만, 역사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방법을 확인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먼저 ‘자유의 길’ 출발점인 시내 중앙의 보스턴 코먼공원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으로, 미국 혁명 당시 주민 회합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여행자안내센터에서 지도를 챙긴 다음 ‘오늘은 헷갈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붉은 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자유와 독립, 새 국가에 대한 희망과 투쟁의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니 약간의 흥분도 몰려왔다.

‘자유의 길’은 옛 매사추세츠 주청사와 보스턴에서 처음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옛 지방정부 청사 등을 거쳐 ‘보스턴 학살장소’로 이어졌다. 1770년 영국군의 주둔에 항의하던 선량한 시민들이 영국군의 발포로 희생된 곳이었다. ‘학살(massacre)’이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지 자못 궁금했다. 그런데 사망자가 5명이어서 좀 어안이 벙벙했다. 미국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영웅으로 요란하게 치켜세우는 나라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6개의 주요 역사 현장을 이은 ‘자유의 길’. 관광객들이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미국 혁명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더구나 미국은 북미에서 수천년 동안 살아온 인디언을 학살하고 내쫓으면서 세운 국가가 아닌가. 이들의 희생은 외면하면서 5명이 사망한 곳에 ‘학살’ 표식까지 해놓은 미국의 이중성이 섬뜩했다. 그런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전쟁에서 사망한 수천명의 아랍인은 외면하다가 미국인이 1명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요란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붉은 선은 보스턴 항구 근처의 구시가지로 이어졌다. 구시가지에 남아 있는 옛 건물들은 대부분 로브스터와 게, 굴 등 해산물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지나니 독립전쟁의 또 다른 영웅인 폴 리비어의 동상과 노스처치가 나타났다. 리비어는 영국군의 동향을 미군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을 제안하고 전령사 역할을 했던 인물이며, 노스처치는 첨탑의 전등 신호로 영국군의 움직임을 전달한 곳이다. 이런 것까지 유적으로 보존하고 이를 신화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마지막으로 찰스 강을 건너 미 해군의 모태가 됐던 찰스타운 해군기지를 거쳐 벙커힐(Bunker Hill)로 이어졌다. 벙커힐은 보스턴 외곽의 작은 언덕으로, ‘차 사건’ 이후 해상을 봉쇄했던 영국군과 외곽의 미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를 치른 곳이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약 1000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벙커힐을 탈환했지만, 이것이 1783년까지 8년 동안 9000여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펼쳐진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그 언덕엔 67m의 오벨리스크 첨탑을 만들어 보스턴 시내를 조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보스턴 시내 한가운데 현대식 고층 빌딩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옛 지방정부 청사(Old State House). 이곳에서 보스턴에서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이 낭독됐다.

▶반쪽의 혁명, 미완의 혁명=‘자유’. 이 두 음절의 단어에 미국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면 과장일까. 그만큼 자유는 미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다. 자유를 향한 투쟁, 큰 희생을 대가로 얻은 자유는 신생국 미국의 건국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고, 다양성 속의 통일을 기하며 번영을 이루는 토대가 됐다. ‘자유의 길’ 순례는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뜻 깊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자유는 반쪽의 자유였다. 흑인 노예와 인디언들에게는 속박과 배제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이 자유를 얻고 동등한 시민으로 투표권까지 얻는 데에는 그들의 투쟁이 필요했다. 지금도 미국의 자유는 미국의 국가 이익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인정되고 있다. 그걸 미국은 ‘합리성’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만큼 역사와 현실을 균형 있게 보는 것이 필요했다.

보스턴은 이외에도 꼭 둘러봐야 할 곳이 많다. 보스턴을 가로지르는 찰스 강변, 찰스 강 북쪽 케임브리지 지역에 있는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 하버드와 MIT, 다문화의 현장으로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차이나타운 등등 모두 강한 인상을 남기는 곳이었다.

보스턴은 여러모로 멋진 도시다. 나중에 살고 싶은 도시를 꼽으라면 보스턴을 꼽고 싶을 정도다. 유럽에 비하면 턱도 없지만 미국으로선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아름다우며, 평화롭고, 활기가 넘치는 도시다. 최고의 대학을 거느린 도시, 다문화가 살아숨쉬는 도시, 자연과 주변 환경이 잘 어우러진 전원도시다. 지적 희열과 정서적 만족감을 동시에 느낀 여정이었다.

hjlee@heraldcorp.com

보스턴 구시가지. 주로 18~19세기에 지어진 건물들로, 지금은 로브스터와 게, 굴 등 특산 해산물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으로 바뀌어 있다.
‘보스턴 학살장소’. 1770년 영국군의 주둔에 반대하는 시민 5명이 영국군의 발포로 사망, 영국에 대한 반감이 고조된 장소다.
찰스 강 쪽에서 바라본 보스턴 시내. 고층 빌딩들이 시 중심부에 밀집돼 있고, 그곳만 벗어나면 자연과 잘 어울린 전원도시가 펼쳐진다.


<여행 메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해준 헤럴드경제 문화부장은 2011년 10월 12일 한국을 출발, 아시아에서 유럽~남미~북미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희망찾기 세계일주’를 펼쳤습니다. 전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아내,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중학생 조카 등 5명이 시작한 이번 여행을 통해 이들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각자의 삶과 우리 사회의 새 희망을 찾았습니다. 때로는 우왕좌왕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진한 가족애도 쌓았습니다. 삶의 목표를 확인한 사람이 하나씩 귀국해 마지막 여정에선 아빠 1명만 남게 되는 이들의 생생한 여행 이야기는 인터넷 카페 ‘하루 한걸음’(cafe.daum.net/changdonghee)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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