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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지하경제 양성화? 불법 사채시장 가보니
[헤럴드경제=최진성 기자]지난 8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앞 R호텔. 옆구리에 검은색 손가방을 찬 몇몇 노인들이 로비 앞에 모여있다. 잠시 후 검은색 대형세단이 줄지어 멈춰서자 노인들이 하나둘씩 차를 타고 사라졌다.

“저분들이 전주(錢主)에요. 허름한 옷차림에 힘도 없어 보이지만 한때는 명동 사채시장을 쥐락펴락했죠.” 명동에서 대부중개업을 하고 있는 K씨가 말했다.

전주는 사채시장에서 돈을 공급해주는 일명 ‘큰손’(자산가)이다. 가계수표나 기업어음 할인이 들어오면 전주를 찾아 물건을 거래한다. 과거에는 하루에 100억원대의 자금을 조달하는 전주가 수백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명동성당에서 롯데백화점으로 가는 길 한중간에 있는 유네스코회관은 과거 사채업자들의 본거지였다. 지금은 사채업체는 온데간데 없고 넘쳐나는 외국인 관광객과 저가 화장품 가게에 둘러싸여 판촉 소음에 몸살을 앓고 있다.

어음 중개 역할을 했던 인근 구두방에는 ‘¥’, ‘$’, ‘상품권’ 등의 표지만 붙어있다. 한 구두방 주인 L씨는 “어음 할인은 옛말”이라면서 “요즘은 일본인, 중국인이 많이 오니까 환전으로 먹고 산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의 지하금고’로 불리던 명동 사채시장이 마지막 쇠퇴기를 걷고 있다. ‘큰손’들은 모두 떠났고 ‘개미’ 전주만 남아 이자놀음을 하고 있다. 사금융시장에서 나오는 기업정보를 판매하는 업종으로 전향한 큰손도 있다.

명동 사채시장은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0년대 초 ‘벤처 붐’을 계기로 반짝 호황을 누렸지만 정부의 ‘세원 발굴’ 노력이 지속되면서 존폐의 위기에 몰렸다. 큰손들이 벤처기업이 모여있는 서울 강남으로 많이 이동한 것도 이 때다. 그나마 거래돼온 기업어음 할인도 2004년 ‘전자어음법’이 시행되면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사채는 비자금 등 ‘검은 돈’을 양산하고 세금을 탈루하며, 서민의 고금리를 착취하는 명백한 불법이다. 정부의 대대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생겨난다. K씨는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파는 사람도 있다”면서 “단속하면 할수록 더 깊은 지하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도 “사채시장을 근절할 방도가 없다”고 털어놨다.

사채의 긍정적인 면도 전혀 없진 않다. 돈이 급한 사람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한다. 가령 제도권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기업이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을 막기 위해 명동을 찾는 것이 대표적이다. 명동에 기업정보가 돌고 은행, 증권사, 정부기관 등에서 나온 사람들이 사채업자와 정보를 교류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K씨는 “명동에서 돈이 풀리지 않으면 그 기업은 끝나는 것”이라면서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사채업자들도 리스크관리를 철저히 한다”고 말했다.

/ip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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