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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포럼> 종이를 위한 변명
중학교 시절 두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하나는 한 알만 먹어도 한 달 혹은 1년 동안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비타민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고, 하나는 베개처럼 베고 하룻밤을 자고나면 책 내용이 머릿속에 입력되는 기계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게으른 사람이 갖는 허황된 소망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두번째 소망은 절로 이뤄졌다. 바로 ‘클라우드 컴퓨팅’이다. 앱스토어에 42만개가 넘는 소프트웨어 응용프로그램이 올라왔다. PC도 필요 없게 된 세상이다. 스마트폰은 그 결정체다.

그 결과 어느새 종이책을 읽는 일이 퍽이나 피곤한 일이 돼버렸다.

사실 진작부터 ‘디지털 격류’가 온 세상을 휩쓸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 격류에 기쁘게 정신을 놓고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다. 문제는 속도 조절이 되기는커녕 갈수록 가속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를 불안해하기라도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정도다.

종이책에서 읽은 한 편의 시가, 한 도막의 지식이 사람에게 왜 중요한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라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이르는 과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활자가 눈에 들어가 뇌를 거쳐 가슴까지 내려오는 그 먼 길은 인지와 감성이 고도로 교차 작용한다.

하지만 ’느림의 종결자’와 같은 종이책 읽기가 얼마나 더 계속될 수 있을까?

이제 성질이 급해질 대로 급해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TV도 보려들지 않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작년을 기준해서 볼 때, 10년 전보다 시청률이 6%나 떨어졌다고 한다. 특히 20대의 시청률은 60%나 떨어졌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옛시절의 할아버지 때도 아들 때를 걱정했고, 다시 아버지 때가 되자 아들 때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동안 다들 잘 살아왔지 않느냐.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자. 그 옛시절에는 길을 걸으면서까지 디지털에 넋을 빼앗긴 채 ‘속도감’에 대책없이 취해있지 않았다.

두어 달 전 미국 스탠포드대학 연구팀의 걱정스러운 실험결과가 발표됐다. 스마트폰 사용이 사람의 뇌에 미치는 영향을 자기공명 영상촬영(MRI)을 이용해 심층분석한 내용이었다. 그 중 하나가 종이책 한 권을 건성으로 훑어보게(스마트폰 보듯이) 했을 때와 정독하게 했을 때, 서로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었다.

앞의 경우는 뇌의 주의력과 관련된 부위만 활성화됐지만, 뒤의 경우는 뇌의 주의력은 물론 신체 동작이나 촉감과 관련된 부분까지 활성화된 것으로 확연히 차이가 났다.

디지털 화면을 통해 글을 읽다 보면 사람의 두뇌회로 자체가 그쪽으로 길들여져 인지능력과 사고능력이 저하된다는 것이었다. 편리하지만 디지털로 인해 우리 뇌가 점점 졸아들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생각하지 않는 뇌를 가진 사람, 생각할 이유가 없는 뇌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찬 우울한 세상이 금세 다가올 것만 같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깨듣는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종이와 더불어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시작과 끝만 있을 뿐 그 삶의 과정이 날아가버린 듯하다.

과정이 없는 사람의 생애는 종이가 없는 시간과 다르지 않다. 바로 기계화돼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시간이란 것이다.

<이상문 소설가ㆍ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현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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