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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출한국 격동의 현장엔 그가 있었다
수출보험공사·KOTRA 중책 역임한 조환익 한국전력 사장…스토리가 있는 관료 출신 CEO 그의 삶과 열정
미국서 선임연구원 생활때 한국 외환위기 소식…나라가 망할수 있다는 생각에 눈물 뚝뚝…그때 금모으기 캠페인 아이디어 제안도

KOTRA 사장 자리에 앉자마자 글로벌 금융위기 찾아와…해외 바이어 초청 ‘바이 코리아’ 기획으로 20억弗 대박…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차

한전 취임 첫날 전력수급대책반 가장 먼저 찾아가 소통 강조…올 겨울 전력위기대응 원활했다 평가 받았는데 그건 국민들 참여 덕분

장관의 꿈? 내가 행시 14회인데 현 장관이 행시 25회…선배로서 그런 행보는 추할뿐이지




100억달러도 수출하지 못하던 시절. 우리는 바이어들이 원하는 상표를 달고 수출해야만 했다. 시장을 개척할 능력도 없었다. 협상력은 ‘제로’였다. 그래도 우리는 어떻게든 물건을 내다팔아야 그나마 먹고 살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세계 인구 10명 중 3명은 우리가 만든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우리 브랜드의 전기ㆍ전자제품과 자동차는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한국인의 DNA는 이처럼 위대하다.

저절로 이뤄졌을까. 아니다. 해외 바이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면서, 중동에서 모래밥을 먹으면서, 달러화와 엔화의 파상공세를 견디면서 만들어냈다. 개척의 전설, 소통의 전설, 맷집의 전설, 바이 코리아의 전설들이 우리만의 신화를 가능하게 했다.

 
“공직생활을 그만두려하오.” 고민 끝에 아내에게 물었다. “그러세요.” 답변은 쿨했다. 한국전력 사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한 우리나라 최고의 통상전문가 조환익. 그의 레전드는 공직의 옷을 벗고나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런 그는 뼛속까지 애국자. 그의 60여년 인생 스토리가 궁금해진다.                                                                                        [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이런 역사의 산증인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공직의 옷을 벗어던지고 과천을 떠난 그는 잠시 잊혀졌다. 그러나 조 사장은 수출보험공사 사장으로, KOTRA 사장으로 맹활약한다. 작년말 신성장 동력 산업으로 우뚝 선 에너지 공기업의 맏형, 한전 사장에 취임하면서 또 다른 전설을 쓰고 있다.

혹자는 그를 놓고 관운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노력을 이기는 운은 없다 하지 않던가. “도전을 멈추지 마십시오. 익숙한 곳, 그 바깥에 기회가 있습니다.” 조 사장의 말이다. 40여년간 수출 최전선에서 ‘무역대국’ 한국을 만든 조 사장. 관료 출신 최고경영자(CEO)의 전설을 만들어가는 그의 인생 스토리 속으로 빠져보자.



▶한ㆍ미 통상마찰 그리고 아내의 편지=1984년, 편지 한 통이 사무실로 날아들었다. 봉투에는 보내는 사람 이름이 없었다. ‘파김치가 돼 집에 들어와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유령 같은 그대여’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조 사장의 아내가 보낸 것이었다. ‘아이들 학교 문제도 상의해야 하고, 집 고칠 데도 있습니다. 도저히 얼굴을 볼 수 없어 편지로 상의하니 답장을 주세요’라고 돼 있었다고 한다.

“집에서 대화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쁜 남편이었으니 아내가 할 수 없이 편지로 대화를 요구했던 것”이라면서 “러브레터인지 경고장인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답장하지 못했다”면서 조 사장은 기분 좋은 추억 속에 잠시 빠졌다.

당시 조 사장은 상공부 미주통상과장으로 일했다. 한ㆍ미 통상마찰이 최고조에 달할 때였다. 반미감정도 고조돼 있었다. 그는 “한국 제품의 미국 수출이 1980년대 들어 부쩍 늘어나자 미국 업계가 경계를 시작했고, 결국 미국의 무역보복으로 이어졌다”고 회상했다.


핵심제품은 우리 삼성ㆍ금성ㆍ대우의 컬러TV였다. 이전에도 섬유나 철강 등 분야에서 미국 업계의 제소가 끊이지 않았지만, 결정판은 우리 컬러TV에 대한 반덤핑 제소였다.

“우리나라 제품이 너무 잘 팔리자 미국의 제니스 같은 업체들이 싹을 잘라버리겠다며 미 정부에 제소했다. 덤핑 판정을 받으면 아예 수출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면 삼성이나 금성이나 다 망하는 상황”이라고 기억했다.

여기에다 우리 영세기업의 앨범이 미국에서 덤핑 판정을 받기까지 했다. 거리에는 “미국 수출길이 막힌 앨범입니다. 사주세요”라는 목소리가 넘쳐났다. 앨범이 불티나게 팔렸다. 초짜 과장 조환익에겐 잊지 못할 사건이다.

조 사장은 “새로운 시장 개척의 필요성과 통상문제에 대해 우리나라가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숱하게 얻어맞았지만 맷집을 키웠다고도 했다. 아프리카 담당 사무관 시절, 미지의 시장을 개척한 조 사장. 초짜 과장 시절 겪었던 거대 사건은 그의 개척정신을 더욱 성숙시켰다.

▶“그만두려하오” “그러세요”

2001년 4월. 조 사장은 이날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당시 인사적체에 시달리던 산업자원부에서 차관보였던 그가 용퇴를 선언한 날. 후배들을 위해 길을 터주겠다던 그를 언론은 ‘아름다운 용퇴’라면서 박수를 보냈다.

“사실 난 서울 사람인데, 당시 지역균형 차원에서 불이익을 감수해달라고 위에서 말하더라고요. 만일 그때 체면 구기고 좀 더 버티면 차관되는 속도는 더 빨랐겠지만, 그런 모습을 후배들한테 보이기는 싫었습니다.”

그때 그를 다잡아준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개인적으로는 갈등이 참 많았는데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바로 ‘그럼 그만두라’ 하더군요. 나는 아주 고민 끝에 물어봤는데….”

“보통 상대방이 말려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나보다 (아내가) 훨씬 적극적이었어요. 그냥 눌러앉아 있다가 차관하고 나왔으면 그냥 관료일 텐데 지금 나는 스토리가 있는 관료출신 CEO가 아닌가요.” 그는 “내 아내가 연출력이 좀 있는 사람인 것 같다”며 아내 자랑을 늘어놓는 팔불출이 잠시 되기도 했다.

그의 레전드는 지금부터다. 조 사장은 한국산업기술재단 사무총장이 된다. “보잘것없는 조직이었다. 이 조직을 키우면서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그는 사무총장을 관둘 때 거의 조(兆) 단위의 사업비를 만들어 놓고 나왔다고 했다. “그때 남들 앞에서 말하는 화술도 제대로 배웠고, 밖에 나가서 ‘을’도 돼 봤고, 공무원이라는 제도권 틀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키우는 사업도 해봤고, 사람을 다뤄보기도 했다. 이게 현재의 나를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다”고 회상했다.

▶남들은 말렸지만…

KOTRA로 자리를 옮긴 조 사장. KOTRA 근무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1974년 아르바이트생 조환익이 조 사장이 돼서 돌아온 것.

그러나 인연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사장 자리에 앉자마자 본격적인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더욱이 당시는 KOTRA가 정체성 위기를 겪으면서 무용론에 직면했던 때. 하지만 위기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박 4일 두바이로 날아갔다. 독일에서 자동차부품 상담회를 열고, 중국과 동남아, 일본 등의 시장상황을 점검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위기의 여파가 한창이던 2009년 1월, 그는 해외 바이어를 국내로 초청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불쏘시개가 필요했다. 장(場)을 세워야만 했다. 전 세계가 불황의 늪에 빠졌지만 조 사장은 ‘바이 코리아(Buy Korea)’를 기획했다. 찾아가서 물건을 사달라고 때를 써도 안 팔리는 마당에 한국으로 바이어를 부르자는 제안에 직원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왜 하필 1월이냐” “시간이 없다”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 등 주변에선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막상 행사를 개최하니 전 세계 바이어들이 몰려들었다. “코엑스에서 가장 큰 홀이 발 디딜 틈이 없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원자재나 생필품은 사야 하지 않겠어요.” 예상은 적중했다.

시장은 침체돼 있었지만 한국에서 제품을 좀 더 싸게 구입하고 싶었던 바이어들은 분명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행사장을 내려다 봤어요. 눈물이 나더라고요.” 신임 감독이 첫 작품에서 1000만명 관객을 동원한 셈이다.

20억달러 이상을 계약하는 대박을 쳤다. 위기 탈출을 앞당겼다. 조 사장은 이 기획이 한국을 발돋움시키는 발판이 됐다는 자부심에 아직도 그때 행사 사진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한다.

▶소통의 달인? “아니야 난 원래 먹통”

“난 먹통이었어.” 그는 역대 최고 공보관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는 손사래를 친다. “한마디로 역대 최고의 먹통 공보관이었다. 외부에서 떠돌던 저를 한 선배가 추천해 공보관이 됐는데, 낙하산 공보관이 오다보니 기자들도 처음에는 나를 찾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성은 금세 발휘됐다. “보도자료가 나오면 제가 흐름을 분석해줬죠. 공보관 본연의 임무를 했을 뿐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췄다.

소통의 전설은 한전 사장 취임 다음날 바로 나타났다. 그는 지식경제부 관계자들에게 번개미팅을 제안했다. 가장 시급한 전기요금 인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은 장관부터 실무 과장까지 모두 다라고 생각한다. 한전 사장이라고 목에 힘주고 있으면 풀릴 문제도 안 풀린다”고 했다. 전기요금 인상의 단초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조 사장은 관련부처를 뛰어다녔고, 언론에 협조를 구했다.

특히 겨울철 전력난은 최대 당면 과제. 취임 첫날 전력수급대책반을 가장 먼저 찾았다. 그러면서 국민과 소통을 강조했다. 올겨울, 매서운 추위에도 전력위기대응이 원활했다는 평가에 대해 조 사장은 “국민들의 참여 덕분”이라고 했다. 조 사장은 봄철 제2의 국민과 소통을 준비 중이다.

“4, 5월이 되면 원자력발전소를 유지보수해야 한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국민들의 긴장도가 떨어지게 될 것”이라면서 “오히려 이때 더 위험할 수 있다. 유지보수를 적절하게 분산시켜 공급에 무리를 덜 주고 피크타임 전력요금제는 더 확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제 조 사장은 통상전문가에다 에너지 전문가 타이틀도 함께할 정도다. 사실 조 사장은 1998년 북한 신포에서 발전소를 짓는 경수로발전기획단 일원이었고, 차관 시절 전력수급대책과 에너지기본법을 만든 주역이다. 그는 오는 10월 세계에너지총회 조직위원장까지 맡았다.

▶뼛속까지 애국자

“좌우명이 뭡니까?” “좌우명은 없고 ‘음수사원(飮水思源ㆍ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생각하자)’이 가훈”이라고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조 사장은 미국 국제전략연구소에 선임연구원으로 있었다. 타국에서 맞은 조국의 경제위기에 그는 눈물을 훔쳤다고 고백한다.

“미국 언론들이 한국경제를 모래 위의 누각이라고 표현했어요. 하루는 혼자 있는데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지금의 그리스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훨씬 아래로 보던 국가에 일자리를 구하러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국내 유력 언론사 고위 관계자에게 금 모으기를 제안했다고 했다. “누가 먼저 얘기를 꺼내 국내에서 금모으기가 시작된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금모으기 캠페인을 아이디어로 제안했어요”라고 말했다.

남 다른 애국심에 대해 그는 상공부 특유의 문화를 이유로 꼽았다.

“상공부는 예부터 국가 성장을 주도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다른 부처는 돈을 쓰는 부처이지만 우리만 돈을 벌어온다. 이런 자부심이 애국심으로 발전됐다”고 설명했다.

조 사장은 특히 “외환위기 때 ‘기업이 잘못이냐 은행이 잘못이냐’ 논란이 있었지만, 분명 기업이 탐욕을 부린 것은 맞지만 이럴 때 기업을 죽이면 더 이상 회복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장관 꿈이 없지 않을 터. “제가 행시 14회인데…” 답변은 단호했다. 현 장관은 행시 25회다.

그는 후배들에게 어떤 문제든 죽도록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고 조언했다. 반 발짝 먼저 가고, 30분 일찍 일어나고, 한 번 더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도 이를 안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조 사장은 실천했을 뿐이다.

윤정식 기자/yj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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