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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김용택의 살구꽃 마을 이야기
꽃들이 높이 달아놓은 등불 같은 곳
[북데일리]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어린 날의 추억과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신작 <살구꽃이 피는 마을>(문학동네. 2013)은 섬진강에 대한 산문을 모아 엮은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총 8권 중 제2권에 해당한다. 살구꽃이 하얗게 핀 봄날 밤, 빨치산이 동네에 내려왔던 날 이야기부터 친구 금화, 태수, 현철이, 정남이 누나와 함께 했던 섬진강 진메 마을에 얽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봄이 되면 이 살구나무에 꽃이 만발하여 동네 가운데에 높이 달아놓은 등불 같았다. 꽃이 질 때는 이끼가 핀 오래된 검은 돌담 위에 꽃이 하얗게 떨어지고, 길에도 하얗게 떨어져 그 골목길은 꽃길이었다. 바람이 불면 살구꽃은 오금이네 집 지붕 위를 지나 점순이네 집 지붕 위를 거쳐 태환이 형네 초가지붕 위까지 날아가 앉았다. 어머니가 복두네 샘에서 물을 길어오시면, 물동이 속에 꽃잎이 동동 떠 있기도 했다. 살구꽃이 흩날리는 길로 사람들이 물을 길어오고, 나뭇짐을 지고 가고,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p28)

무더운 여름밤의 에피소드. 여름밤이면 더위를 피해 아주 어린 아이들만 빼놓고 동네 남자들은 거의 다 강변 잠을 잤다. 밤이 깊으면 여자들은 미역을 감으러 나왔다. 그럴 때 아이들은 손전등을 가지고 누님들에게 장난을 쳤는데, ‘달덩이’라는 시가 유쾌하다.

“달 없는 늦은 밤 / 누님들은 징검다리에서 목욕을 했다. / 어느 날 밤 / 손전등을 들고 / 살금살금 다가가 / 번쩍 불을 켰다. / 허연 엉덩이들이 / 달덩이처럼 붕 떴다가 / 비명과 함께 / 사라졌다.” (p102~p103)

산과 들에 하얗게 눈이 쏟아지던 겨울 풍경도 아름답다. 학교 운동장가에 있는 벚나무 가지마다 눈들이 가득 쌓여 마치 벚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날.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나가 눈싸움을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싸움은 점점 육박전으로 번지고, 눈을 뒤집어쓴 여자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싸움이 점점 치열해져 그는 뒷산까지 도망갔는데 웬 여자아이가 쫓아왔다.

“소나무 위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나는 그 가시내에게 눈을 퍼부었다. 내가 눈을 퍼붓자 가시내는 눈 위에 누워버렸다. 그 아이가 크게 웃었다. 깔깔깔 웃는 그 여자아이의 하얀 웃음이 눈 속에 숨어버렸다. 눈이 하늘 가득 내렸다. 나도 그 여자아이도 세상에서 사라지고 하얀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지금도 그 여자아이가 누군지 분명하지 않다. (중략) 나는 그때 눈 위에 누워 하얗게 웃던, 그래서 나는 눈 속으로 햐얗게 지워버리던 그 아이가 누군지 모른다. 눈은 하늘 가득 내려와 그녀의 웃음 위에 하얗게 내렸다.“ (p202)

 

가난하고 누추한 살림살이에도 천진난만하고 순수했던 어린 아이들과 정 많고 순박했던 우리 이웃들.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곳이지만 그와 함께 추억 여행을 떠나니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지나버린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때 읽으면 좋을 책이다.


[북데일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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