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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 율곡이 본 조선중기는 ‘토붕와해’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지금의 국사는 마치 큰 병을 치르고 난 뒤에 원기가 아직 회복되지 못해 마디마다 아프고 저린 것 같아 한번 조섭을 잘못하면 곧바로 위급한 상태로까지 이를 지경에 다다랐다.”

율곡 이이가 바라본 조선 중기의 위태한 모습이다. 바로 토붕와해(土崩瓦解)다. 지은 지 오래돼 벽이 무너지고 기와가 부서지고 서까래가 썩어버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고가(古家)로 본 것이다. 1564년 29세로 급제한 율곡이 사간원 정언으로 제수되자 그해 겨울 올린 사직 상소인데, 국정에 대한 진단이 뼈아프다.

율곡 이이에 대한 연구는 많이 나와 있지만 이이의 한 면만 드러내는 측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원로 국사학자 한영우 이화학술원 교수는 ‘율곡 이이 평전’(민음사)에서 역사학자의 통합적 시각으로 조선사회 병증을 고치고자 관직에 오른 뒤부터 부단히 직언한 강직한 율곡을 그려낸다.

한 교수는 “율곡을 모르면 조선 후기를 이해할 수 없다”며, 임진왜란 이후의 300년 조선의 개혁은 모두 율곡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 교수는 율곡을 두 가지 측면에서 집중 조명한다. 하나는 온건한 중도개혁자로서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대립과 갈등을 넘어선 통합과 중재자로서의 모습이다.

율곡이 제시한 당시 위기탈출 해법은 경장이다. 조선 초기 세워진 왕조의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연산군 이후로 민생을 파탄으로 몰아간 잘못된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다. 이는 공납과 군역의 폐단, 지방 노비를 중앙으로 보내는 선상, 서얼에 청ㆍ요직 불허 등 수취제도의 폐단과 신분제도의 모순 시정이 골자다. 율곡은 경장을 계지술사(繼志述事)라 불렀다. 선왕의 좋은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잘못된 것은 시의에 맞게 고치자는 것이다.

진언들을 보면 그 절실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간원 정언이 된 이듬해에도 율곡은 대사간 강사필이 올리는 상소문을 대신 작성해 주면서 정심(正心), 용현(用賢), 안민(安民) 등 세 가지 시무책을 올린다.

우선 임금이 군사(君師)의 책임, 즉 임금의 직책과 스승(학자)의 두 가지 책임을 다할 것을 강조한다. 또 인재등용과 관련, 나라를 경영하는 능력으로 인재를 키우고 시골에 숨어사는 선비를 발탁할 것을 권한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의 핵심은 세금. 율곡은 세금 연좌 금지, 황무지에서는 세금을 받지 않고 공납, 공노비의 선상은 경국대전에 있는 것만 받도록 제안했다.

명종 21년에 올린 상소지만 이는 선조대에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선조 6년 당상관에 올라 경연에 참석하게 된 율곡이 선조에게 또 개혁을 꺼낸다. “요순 삼대의 이상을 한꺼번에 이루자는 것이 아니며 하루에 한 가지씩 일을 하다 보면 점입가경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곡은 이듬해에는 장문의 개혁 상소를 올리는데, 이른바 ‘만언봉사(萬言封事)’다. 조정과 정책에 실(實)이 없음을 지적하고 공물과 선상, 군정의 개혁을 제안한 것이다.

선조 10년 대사간의 벼슬을 내리자 율곡은 거부하고 “저에게 시사에 대해 물을 것이 있으시면 하문하시고, 그 말이 채용될 수 없다면 다시 부르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뒤 파주로 내려간다. 율곡은 파주에서 두 번째 ‘만언봉사’를 올린다.

여기서 율곡의 질책은 내용의 수위와 강도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오늘날의 인심과 세도가 이 지경이 된 것을 보면 전하의 정치와 교화가 훌륭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분발하여 성인이 되시려는 뜻이 없으셨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럴 것으로 보고 정심, 섬의에 대한 말을 듣기 싫은 진부한 말이라고 하고” 식이다.

율곡이 40세가 된 1575년 선조 8년은 사림이 동서로 나뉘며 붕당정치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율곡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인 심의겸과의 친분을 이유로 서인으로 지목되며 동인의 공격을 받았다. 동서 붕당 간의 싸움은 율곡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화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율곡의 조정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의 직언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율곡을 아꼈지만 변화는 싫어했다. 저자는 율곡의 애민정신과 따뜻한 포용력을 성장기의 체험과 관련 짓는다. 16세에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서모와의 인간적 갈등에 금강산 승려가 됐으며, 수차례 과거에 실패한 경험 등 고뇌와 시련을 통해 율곡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시대의 위기를 간파하고 집요하게 진언한 율곡의 선각자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통합적 인물로서 율곡을 조명해낸 점이 새롭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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